[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22)선유봉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9월 5일 18시 29분


지금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양화선착장 일대의 260년 전 모습이다. 이 곳에는 선유봉(仙遊峯)이라는 매혹적인 산이 있었다. 신선이 놀던 산이라는 뜻이다.
관악산과 청계산의 서쪽 물과 광교산 수리산 소래산의 북쪽 물을 몰고 온 안양천이 산자락을 휘감으며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붓끝처럼 솟아난 산봉우리였다. 선유봉은 그러나 1965년 양화대교가 이 곳을 관통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 산자락 강변에는 서울로 가는 큰 나루와 안양천을 건너 양천으로 가는 작은 나루가 있었는데 모두 양화(楊花)나루라 불렀다. 이 곳의 지명이 당시에도 양천현 남면 양화리였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안양천 건너 염창리 쪽에서 본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작은 양화나루 쪽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안양천 하구를 건너는 작은 양화나루에는 나룻배 세 척이 있었던 모양이다. 두 척은 강가에 매여있고, 한 척이 막 길손들을 염창리 쪽에 내려놓은 듯 말탄 선비 일행이 모래사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사공이 긴 삿대를 강변 모래펄에 꽂아 나룻배를 물가에 고정시키고 서있는 것은 아마 이쪽에서 건너갈 길손들을 기다리기 위해서인 듯하다. 한나절이라도 기다릴 태세다.
지금 이 곳을 지나는 성산대교 위는 물밀 듯 이어지는 차량 행렬이 분초를 다투며 서로 앞서가려 초조해하지 않는가. 이 사공의 여유와 비교할 때 행복의 기준이 어디에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선유봉 양쪽 아래 나루에는 모두 큰 마을이 들어서 있었던 모양인데 여기 보이는 것은 작은 양화나루 마을이다. 초가집들은 나루터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평민들의 집일 것이나, 큰 기와집은 이 곳에 은거해 살았다는 연봉 이기설(蓮峯 李基卨·1558∼1622)이 살던 집일 듯 하다.
이기설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량을 조달하는 실무를 담당하다 상관의 부정을 목도하고 벼슬을 버린 뒤에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 아래에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은거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한 인물이다.
그는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으로 짐작하고 가족을 이끌고 이 선유봉 아래로 이사해 광해군이 높은 벼슬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광해군 9년(1617)에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자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이기설은 다시 선유봉 아래 양화리를 떠나 김포로 숨어버렸다. 그가 죽고 난 다음해(1623)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에게는 이조참판직이 추증된다.
이기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조선 중종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선비)인 이언침(李彦욞· 1507∼1547)의 손자이고, 효자로 유명한 영응(永膺)선생 이지남(李至男·1529∼1577)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지남 때부터 선유봉 아래에 터잡아 살았던 듯 ‘양천읍지’에서는 이지남의 두 아들인 이기직(李基稷·1556∼1578)과 이기설 형제의 유적이 선유봉에 있다고 했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이기설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큰 양화나루쪽 한강은 먼 경치로 처리됐는데 돛단배 두 척이 아득히 떠가고 강 건너 멀리 남산이 솟아있다. 모래사장에 버들숲이 우거지고 마을 뒤편에도 키 큰 버드나무가 서있어 버들꽃 피는 양화나루를 실감케 한다.
영조 18년(1742) 비단에 채색한 24.7×33.3㎝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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