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21>이수정(二水亭)

  • 입력 2002년 8월 29일 17시 36분


이수정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都堂山·지금의 증산) 상봉에 있던 정자다.

‘양천군읍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염창탄(현 안양천)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 효령(孝寧)대군(1396∼1486)의 임정(林亭)이 있었다. 그 후에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1555∼1636)과 그 아우인 찬성(贊成·종1품) 이덕형(李德泂·1566∼1645)이 늙어서 정자를 고쳐짓고 이수정(二水亭)이라 했다.’

이덕연 형제가 벼슬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기 위해 이수정을 지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수정은 이덕연이 70대로 접어드는 인조 3년(1625)경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덕연이 스스로 호를 이수옹(二水翁)이라 했던 사실로 짐작이 가능하다.

이들 형제는 인조반정(1623)이 성공하자 벼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해야 했다. 인조반정은 율곡학파인 서인이 주도하고 퇴계학파인 남인이 묵시적으로 동조해 성공시킨 혁명이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광해군 조정에서 벼슬한 소북 계열이었다. 특히 이덕형은 반정 당시 도승지로 광해군의 심복이었다. 당연히 제거 대상이었으나 옛 임금의 목숨을 보전해 줄 것을 요구하는 충성심이 돋보여 반정 주역들이 포섭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들 형제가 서인 조정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에 이수정을 짓고 언제라도 물러날 준비를 해 두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들 형제는 어떻게 효령대군의 임정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형제의 5대 조모인 비인 현주(庇仁 縣主) 전주 이씨가 효령대군의 정실 외동딸이었다는 사실에서 풀린다. 효령대군이 딸 몫으로 이 임정 일대를 나눠줘 이덕연 형제의 고조부인 우의정 이유청(李惟淸·1459∼1531) 때부터 이 일대가 한산 이씨 소유가 됐던 것이다.

이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최고 시인인 이태백(李太白·701∼762)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세 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갔고, 두 물은 백로 깃들인 모래벌이 가운데를 갈라놓았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이다.

실제 이수정에 오르면 눈앞에 우뚝 솟은 삼각산(북한산)의 상봉을 흰 구름이 감싸 반쯤은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간 듯 보이고, 난지도 모래펄이 한강물을 두 쪽으로 갈라놓는다.

1891년 편찬된 ‘양천현지’를 보면 이수정은 이미 터만 남아있었다 한다. 그러나 겸재가 ‘이수정’을 그릴 당시인 1742년경에는 그림에서처럼 이수정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이 그림은 양천현아 쪽에서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려낸 것이다. 도당산 봉우리들이 강가에 급한 경사를 보이며 솟구쳐 있고, 그 봉우리가 상봉에서 서로 만나며 만들어낸 평지에 이수정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강가 모래톱에서 벼랑 위로 까마득하게 뚫려 있는 외줄기 길이 일각(一閣) 대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사 급한 이 오솔길이 이수정을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지금은 이 부근이 모두 아파트 숲으로 뒤덮여 이런 이수정 풍류의 자취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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