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네트워크]경기중고 미술반 '아직도 따뜻한 울타리'

  • 입력 2002년 1월 31일 13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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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64). 한국적인 토착 정서를 원색으로 표현해온 화가.

강홍빈 서울시 행정1부시장(57). 고건 서울시장의 1급 참모로 10여년간 서울의 도시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한 도시계획 전문가.

김민기 학전 대표(51). ‘아침이슬’ ‘상록수’ 등 젊은이들이 긴 밤 지새우며 불렀던 노래를 만든 대표적 싱어송 라이터.

미술 행정 대중문화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우뚝선 이들을 한데 묶는 인연은 바로 ‘경기중고 미술반’이다. 이만익은 53회 강홍빈이 59회 김민기는 65회다. “우리는 경기(중고)를 다닌게 아니라 경기 미술반을 다녔다”고 표현하는 이들은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테레빈 기름냄새 가득했던 서울 화동(花洞) 경기중고교 미술실에서의 6년을 떠올린다.

미술계에서 활동중인 경기 미술반원은 화가 김종학 오천룡(재불) 박영국(재미), 조각가 최만린 박충흠, 서울여대 임무근(공예과) 인하대 성완경(미술교육과) 서울대 신광석(공예과) 경원대 강경구(회화과) 교수 등. 건축계 인사로는 우규승(재미) 정기용 김석주씨와 서울대 김진균 교수(건축과) 등을 꼽을수 있다.

서울대 오병남(미학과) 유평근(불문과) 안건혁(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최민, 만화가인 덕성여대 이원복, 한림대 윤석헌(재무금융학과) 교수도 미술반 출신이다.

경기 미술반 학생들은 정물을 그리지 않았다. 사생대회의 단골 소재인 고궁을 찾는 일도 드물었다.

“우리는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 눈에 보이는 현실, 펄펄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미술실에 앉아 얌전히 정물화나 그리게 했더라면 6년씩이나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사물을 정공법으로 맞닥뜨리는 기질이 그때 생긴 것 같아요.”

경기중 1학년때 미술반에 들어가 고 3때 미술반장을 지낸 자칭 미술반 ‘말뚝’ 김민기씨의 회상이다.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은 얄팍한 옆구리에 커다란 화판을 끼고 찌그러진 양동이나 사이다병에 붓을 꽂고는 교문 밖으로 내쫓겼다. 우아한 화병과 고즈넉한 경회루 대신 명동의 차량 행렬과 어지러운 간판들, 서울역 광장을 메운 인파, 골목길 아이스크림 장수를 빙 둘러싼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화폭에 담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새벽에 안개를 그린다며 종로 거리에서 이젤을 펼쳐놓기도 했다. 그리지 말라는 푯말이 붙은 문산 자유의 다리를 그리다가 미군 헌병에게 끌려가기도 했다. 숫기 없던 소년들은 행인들의 시선에 단련돼가면서 사물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마음을 키워갔다.

경기 미술반의 또다른 전통은 개성대로 그리기.“일생을 살면서 그렇게 자유로웠던 기억은 없어요. 한번도 이렇게 그려라 저렇게 그려라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요. 선생님은 기교는 도구에 불과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그림들이 모두 달랐어요. 모자 하나도 바로 쓰는 법이 없었던 멋쟁이 홍빈이형은 색이 화려했고 왼손잡이 민이형은 묘사력이 뛰어났어요. 젠틀맨 진균이형 그림은 부드러웠고 영국이는 그림에 끼가 있었지요. 요즘 미대에 응시하는 학생들 그림을 보면 다식판에 찍은 다식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신광석 교수)

미술반 47회로 57년부터 65년까지 미술반 지도교사를 맡았던 서울여대 최경한 명예교수는 “워낙 우수한 애들이라 선생이 별로 가르칠 게 없었다”며 “저희들끼리 서로 견주면서 자유롭게 절차탁마하도록 도와줬을 뿐”이라고 말했다.

반원들도 선후배 동료들간에 서로서로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데 토를 달지 않는다.

“세계명화작품집 200권을 보며 누가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맞히는 게임을 했습니다. 경쟁적으로 외우다 보니 미술사를 꿰뚫게 됐지요.”(김진균 교수)

“개인마다 그림 보관함이 있었는데 서로 남의 것을 열어보며 몇장이나 그렸나 어떤 그림을 그렸나 자기 것과 견줘보곤 했었죠. 이것이 기량을 기르는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신광석 교수)

안건혁 교수는 후에 조각가가 된 ‘충흠이형만큼 그릴 자신이 없어서’ 미대 진학을 포기한 뒤 공학도가 됐고 이원복 교수는 ‘민이형과 완경이형 그림보고 자신이 없어져’ 미술반을 중도 포기했지만 만화가로 대성했다.

하지만 동료와 후배들을 주눅들게 했던 이들도 모두 미대로 진학하진 않았다. ‘그림으로는 밥 못벌어 먹는다’는 집안의 반대가 컸다. 유독 건축학도가 많은 이유도 부모가 원하는 의대, 공대와 미대의 ‘중간 지점’에서 타협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 모두 미대에 진학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문화적인 무언가를 주고 싶었을 뿐이지요. 어느 길을 가든 주도적인 역할을 할 아이들인데 문화적 감각이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최경한 교수)

이때문인지 선배들은 “민기 노래는 그림같다”고 말한다. ‘남산 제모습 찾기’ ‘생명의 나무 심기’ ‘서울정도 600년 사업’ 등 강부시장이 추진한 도시 정책은 그의 그림처럼 다채롭다. 프로 화가가 된 동문 말고는 이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매년 한두차례 최교수를 핑계로 모여 수십년전 청운의 꿈을 그리던 화동 시절을 추억할 뿐이다.

▼취재 뒷얘기/진한 농담만큼 진한 우정

“민기야, 참이슬보다 고운 게 아침이슬이니?” “진균이 너 미술실에서 몰래 담배 피우다 숙직 선생님한테 걸렸던 거 기억나지?” “형, 공부는 안 느는데 술만 늘어 걱정이예요.”

사진 촬영을 위해 옛 경기고 건물이었던 정독도서관 앞 잔디밭에 모인 경기 미술반원들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들의 ‘네트워크’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워낙 바쁜 사람들이라 사진 기자가 한명씩 만나서 찍을 요량으로 맨 먼저 서울대 김진균 교수를 찾아갔다. 하지만 김 교수는 사진용 소품으로 기자가 준비해간 옛 경기고 교복에 배지가 없고 모자에 흰 줄이 없는 것을 지적하며 “소품의 고증이 잘못됐다”고 촬영을 거부했다. 대신 김 교수는 “내가 몇사람 불러 모아 보겠다”고 했고 다음날 점심 무렵 13명의 옛 미술반원들이 달려왔다. “학교 정문에서 보자”고 했는데 서울 강남의 새 교정으로 달려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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