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야마 美 스탠퍼드대 교수 “한국 정치-사회적 갈등은 정치 리더십에 대한 신뢰부족 탓”

신석호 기자 , 이승헌 특파원 입력 2016-01-01 03:00수정 2016-01-06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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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새해 특집]
[세계 석학에게 듣는다]<1>후쿠야마 美 스탠퍼드대 교수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지난해 12월 22일 동아일보와의 화상 인터뷰를 통해 새해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질 정치 상황을 진단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태도에 대해 “아베 신조 총리 식의 역사 접근법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 제공
《 “정치 리더십에 대한 전례 없는 신뢰 부족이 정치 위기의 가장 큰 이유이다. 이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상황이 다르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예언한 ‘역사의 종말’(1992년)로 유명한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64)는 지난해 12월 22일 동아일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확산되는 정치·사회적 갈등과 혼란상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그는 “기술은 발전하고 사회는 더 복잡해지고 국민들의 기대도 그만큼 커지고 있는데 정치 제도와 리더십은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워싱턴 아웃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시그널”이라고 강조했다. 2014년 저서 ‘정치 질서와 정치 쇠퇴’를 펴내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올해 대선(11월)을 앞둔 미국과 총선(4월)을 앞둔 한국의 정치 문제점을 진단하고 북핵,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분석을 내놓았다. 인터뷰는 후쿠야마 교수의 제자인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임은정 교수 연구실에서 실시간 화상 통화로 1시간가량 진행됐다. 연말 세미나와 강연 일정에 바쁜 후쿠야마 교수가 대면 인터뷰 대신 화상 통화를 먼저 제안했다. 》

―세계 민주주의를 선도해 온 미국 정치가 지금 공화당 대선 선두 주자 도널드 트럼프로 상징되는 혼란에 빠져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갈라지고 무슬림, 히스패닉 등 소수 인종 및 종교에 대한 백인 주류 사회의 편견도 거세다. 미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트럼프의 말도 안 되는 각종 주장, 가령 무슬림 입국을 금지하고 히스패닉 불법 이민자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에 벽을 세우겠다는 말들이 사회적으로 멀쩡히 유통되고 있다. 가히 ‘뉴 포퓰리즘’이라 할 만하다. 이는 미국 사회 내부에서 작동해야 할 최소한의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트럼프가 6개월 넘게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정치판을 좌우할 수 있나.

“현재 그는 분노하는 미국인들의 아이콘이다. 트럼프는 백인 블루칼라(노동계층)를 주로 대변하고 있는데 이들은 한때 중산층이었지만 상당수는 현재 그 아래로 밀려나고 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들이 차지했던 전통적인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히스패닉 이민자가 몰려와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협하고 무슬림까지 들어와 정보기술(IT)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기성 정치가 최소한의 해답을 줄 것으로 믿었는데 돌아온 것은 없었다. 그러니 트럼프를 통해 분노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배설 창구일 뿐 답을 주지 못하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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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이 지난해 12월 29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부 정책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5%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해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8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선 ‘미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밝힌 응답자는 전체의 26%였고, 66%는 ‘잘못 가고 있다’고 답했다.

―당신은 2014년 펴낸 ‘정치 질서와 정치 쇠퇴’에서 서로 인정하지 않고 반대만 하는 ‘거부정치(vetocracy)’라는 표현을 만들었다. 그런데 최근 미국 정치가 딱 그 모양새다.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주요 이슈를 놓고 민주, 공화는 물론이고 정부와 의회가 수시로 충돌해 왔다.

“미국 정치에는 오랫동안 상호 견제라는 원칙을 작동시켜 가급적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있었다. 외교안보 등 큰 이슈에서는 소속 정파와 정당을 떠나 큰 틀의 합의를 이뤄낸 게 미국 정치의 오랜 저력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정치에 이런 집단 지성이 안 보인다. 몇 개월 전 방문한 한국도 크게 상황이 다르지 않은 듯했다.”

―당신 지적대로 한국도 여야 갈등은 물론이고 당청 갈등, 야권 분열 등 도무지 합의라는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도 ‘거부정치’에 돌입한 상태인가.

“그렇다고 본다. 사실 역사는 다르지만 지금 한미 양국 민주 정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원인은 엇비슷하다. 급변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강력하면서도 여론의 흐름을 읽는 정치 리더십이 부족하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정치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 정치는 여러 가지로 위기적 요소가 많다. 수십 년 이어진 보수와 진보 세력의 갈등, 대안 세력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척박한 정치적 토양 등이다. 여기에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젊은이들의 상실감은 커지고 있다. 이는 고스란히 정치 혐오감으로 이어진다. 아까 말한 트럼프 돌풍의 이유와 비슷하지 않은가. 한국이 총선과 대선을 연달아 치러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한국에서도 트럼프와 비슷한 인물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그렇다면 정치 리더십은 이 시점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박근혜 대통령은 법안 통과를 위해 국회의장과 충돌하는 등 ‘거부정치’의 한복판에 있는데….

“국정 최고책임자가 여야를 넘나드는 대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내야 한다. 그 다음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시작조차 잘 안 되고 있지 않나.”

―당신은 요즘 민주주의가 추구해야 할 모델로 유럽, 특히 덴마크를 자주 꼽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덴마크가 국토도 작고 인구도 적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잘 작동하고 경제도 발전하고 있다. 들여다보니 정치 지도자가 국민 요구에 부응하는 책임 정치를 하면서 동시에 법치주의가 예외 없이 관철돼 국가 제도가 강력한 효율성을 갖고 있더라. 미국, 한국과 환경은 다르지만 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 덴마크 사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 해 동안 지구촌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 중 하나가 ‘이슬람국가(IS)’ 테러 아닌가 싶다. 프랑스 파리,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 테러로 지구촌 어디도 IS 테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미국에선 무슬림 혐오 범죄도 발생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등 전 세계 자유 국가들이 IS 테러에 대처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IS가 계획하는 테러 자체뿐만 아니라 테러에 대한 사회적 반응 중 하나로 구성원들 간 이질감이 커지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IS 테러 증후군’이라 할 만하다. IS가 최종 타깃으로 삼은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테러 대응 능력에 대한 국민적 신뢰 저하까지 겹치면서 더 문제가 심각하다. 아마 대선 후 새 정권이 들어서야 종합적인 IS 격퇴 전략이 수립될 것으로 본다.

세계 질서의 기본인 국경도 무시하고, 이슬람 세계에서도 이단 세력으로 통하는 IS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말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며 필요하면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미국엔 그런 게 없다. 당연히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군에 그런 추진력이 있을 리 없다. 외교안보 현안에 대처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과 참모들의 역량이 아쉬울 때가 많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나.


“미국이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아시아 재균형’이란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이 지역에 외교적 역량을 집중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과 일본과의 3각 안보 동맹을 형성하는 노력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의 외교 역량이 아시아로 집중된다고 보는 미국인은 내 주변에 별로 없다. 현재 미국의 외교 전략은 중동에 대부분 쏠려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4년, 2015년 신년 국정연설에서 아시아를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올해 마지막 신년 연설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TPP의 타결 정도가 가시적 성과다. 물론 의회라는 문턱은 아직 넘지도 못했다.”

―그런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북핵 문제에 대한 오바마 행정부의 대응은 어떻게 예상하나.

“알고 지내는 한 정부 관료가 얼마 전 나에게 ‘북핵에 대처할 수 있는 정책이 있으면 나에게 팔라’고 하더라. 그만큼 지금은 뾰족한 해법이 안 보이는 게 사실이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조건도 각국이 서로 다르고, 무엇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시그널이 전혀 없다. IS 격퇴만으로도 정신없는데 미국이 북핵 해결에까지 나설 여력은 없어 보인다. 새 정권이 들어서도 당분간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일본계 미국인인 후쿠야마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대해 “여전히 대부분의 미국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식 역사 접근법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 정부는 아베 총리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데 딜레마를 느낄 수밖에 없다.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약력


○1952년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출생 (일본계 3세)

○1973년 코넬대 졸업

○1979년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1979∼1996년 랜드연구소 연구위원

○1996∼2000년 조지메이슨대 교수

○2000∼2010년 존스홉킨슨대 국제관계 대학원 교수

○2010년∼현재 스탠퍼드대 교수

○주요 저서: ‘역사의 종말’(1992년), ‘트러스트’(1995년), ‘정치 질서의 기원’(2011년), ‘정치 질서와 정치 쇠퇴’(2014년)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 신석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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