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한일관계, 과거사 터널 벗어날 대승적 결단 필요”

이승헌 특파원 입력 2015-01-07 03:00수정 2015-01-07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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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95주년 2015 새해 특집]
[2015 격랑의 한반도/세계 석학에게 듣는다]
<중>美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명예교수
동아시아 문제의 세계적 석학인 에즈라 보걸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대학 인근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아 양국 정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더이상 매여 있으면 안 된다.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한 대승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케임브리지(미 매사추세츠)=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일 모두 최근까지 현명하지 못한(unwise) 대응을 해 왔다. 더 늦기 전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고노 담화를 다시 인정하라. 또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의 사과만 기다리지 말라. 한국과 일본은 대승적으로 양국 현안을 재논의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세계적인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85)는 동아일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2012년 이후 냉랭한 한일 관계 해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북핵 등 안보 문제를 비롯해 경제 이슈 등 동북아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더이상 한일이 과거사 문제에 매여 있는 것은 양국은 물론이고 동북아 전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걸 교수는 한국을 수차례 방문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도 수시로 찾으며 관련 저서를 낼 정도로 한중일 3국에 고루 정통한 몇 안 되는 미국 석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17일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의 하버드대 인근 자택에서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한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애정을 드러냈다. 》

―2015년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는데 한일 관계는 좀처럼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금 한일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상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악화되기 어려울 정도다. 문제의 핵심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미 한일 갈등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한국이 일본의 성의 있는 사과를 요구하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 그러나 더이상 이 문제에 얽매이면 양국 관계는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한일 정상이 어떤 해법을 모색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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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베 총리는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는 우리가 잘못했다. 1995년 보상금을 부분 지급했지만 필요하면 다시 지불할 용의도 있다. 법적인 문제 이상으로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입장을 발표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총리의 사과 여부와는 무관하게 양국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한일 정상회담 제의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아베 총리가 먼저 입장 표명을 하면 좋겠지만 박 대통령이 이를 마냥 기다릴 경우 또 시간만 흘러갈 수 있다.”

―아베 총리가 지난달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더 우경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한일 관계가 풀릴 가능성은 더 낮아지는 것 아닌가.


“아베 정권이 갈수록 우경화하는 것은 아베 총리의 탓이 가장 크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정부는 한국과 중국이 과거사 문제를 계기로 일본을 지나치게 밀어붙인다고 인식하고 있다. 한중이 과거사 문제로 일본을 압박할수록 일본도 ‘정치적 자기 보호’를 위해 더욱 우경화의 길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럴수록 한국 정부가 일본이 정상 궤도로 돌아올 ‘명분’을 제공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경제적으로는 한중일 3국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과거사 문제 등 외교 이슈로는 서로 갈등하는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가 더 심화되는 상황인데….

“‘아시아 패러독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북아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한일 관계의 경우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후 상당 기간 한국은 경제적으로 일본에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한일 수교의 조건으로 일본의 차관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이 같은 이유로 한국은 일제강점기에 겪었던 부당한 역사에 대해 일본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할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전혀 다르다. 삼성전자가 소니, 도시바 등 일본 전자업체를 무너뜨릴 정도로 한국은 대단히 강해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디어 일본에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했고 현재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중일 관계도 비슷하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쇠락했고 일제의 침략을 받았다. 1980년대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국이 이제는 동북아를 넘어 글로벌 파워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이제 일본에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전에는 우리가 머리를 숙였으니 이제는 너희 차례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역사적으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게 현 동북아 국제 지형이다.”

―중국의 ‘굴기(굴起)’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내세우는 것도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은 미중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활로를 모색해야 하나.

“나는 기본적으로 오바마 정부가 ‘회귀’라는 표현을 써가며 아시아 정책을 운용하는 것에 비판적이다. ‘회귀’라는 말 자체가 중국 입장에서는 마치 미국이 중국을 지역 내 강국으로 가두려는 ‘반(反)중국적’ 시도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글로벌 파워다. 그런 중국인들에게 필요 이상의 경계감을 불러올 수 있다. 오히려 ‘미국은 지난 200년간 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가져왔고 유럽보다 아시아 지역에서 이해관계가 더 깊다. 그래서 아시아에 다가가려 한다’는 식으로 정책을 폈어야 했다.

아무튼 오바마 정부의 이 정책으로 동북아 지역 내 미중 관계는 한층 복잡해졌다. 이 틈에서 한국이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은 사실 참 쉽지 않다. 내 생각엔 중국과도 잘 지내야겠지만 전통적인 한미동맹에 기초해 이 지역에서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는 균형보다는 약간 중국에 기운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대미 외교보단 대중 외교에 조금 더 치우쳐 있다고 보는 것인가.

“지금까지는 그랬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통적인 한미동맹이 훼손되거나 한 적은 없지만 미국으로선 ‘한국이 중국에 좀 더 기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의 한국 배치를 놓고서도 미중 간 갈등이 첨예하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찬성론자들은 북핵 위협을 억지하기 위해 사드 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사드 체계가 자신들의 군사적 이익에 반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중국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현존하는 군사적 위협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았을 때 결과적으로 위협을 배가시키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중국이 불편해하더라도 한국이 충분히 고민한 끝에 북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사드 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북한의 ‘정치적 교섭력’만 더 높여줄 수 있다.”

―북한은 최근까지도 도발과 유화 제스처를 오가는 특유의 기만 전술을 펴고 있다. 이렇다 보니 미 정부도 북핵 문제에 지쳐서 한반도 이슈가 미 외교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미국이 북핵 문제에 지쳤다기보다는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실 현재는 미국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다. 북한은 대화를 위해 빗장을 열면 한국과 일본 경제가 삽시간에 북한 사회를 장악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 같다. 중국이 북한에 그토록 개방을 요구해도 꿈쩍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라고 본다.

이런 상황에선 한국 정부가 대북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관련 움직임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통일대박론’은 일단 방향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침 오늘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방침을 발표했다. 이런 노력이 북한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는 미국이 여전히 세계 무대에서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가 북-미 관계에 당장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북한에 여러 가지 생각할 계기를 줬다고는 본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해 깊이 연구해왔고 김병국 고려대 교수와 함께 ‘박정희 시대’라는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정책이나 정치 리더십을 어떻게 평가하나. 일각에선 아버지에게서 정치를 배운 박 대통령의 정치적 소통 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책이나 리더십은 결과적으로 당시 한국 상황에선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신으로 인한 민주주의 후퇴, 인권 침해 등은 비판의 대상이지만 한국의 기적적 성장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중국 현대화의 기반을 마련한 덩샤오핑(鄧小平)과 공통점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를 비판하기는 쉬운 일이다. 한국은 이전의 한국이 아니다. 세계 11위 경제 대국의 대통령이란 자리는 쉽지 않다. 변수도 많다. 좀 더 지켜봤으면 한다.”

<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명예교수 약력 >


○ 1930년 미국 오하이오 델라웨어 출생

○ 195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 사회학과 졸업

○ 1958년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

○ 1960년 예일대 조교수

○ 1968∼1999년 하버드대 사회학과 교수

○ 1995∼1999년 하버드대 아시아센터 소장

○ 2000년∼현재 하버드대 명예교수

○ 주요 저서=‘최고의 일본: 미국에 주는 교훈’(1979년), ‘네 마리의 작은 용’(1991년), ‘박정희 시대’(2011년·공저), ‘덩샤오핑과 중국의 변화’(2011년) 등

케임브리지(미 매사추세츠)=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에즈라 보걸#한일관계#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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