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비경]"천수만에 가면 삶도 깃털만큼 가볍다"

  • 입력 2001년 11월 21일 18시 30분


오전 8시, 비상
오전 8시, 비상
‘유유상종’, 끼리끼리 모인다는 이 말이 여기보다 더 실감나는 곳이 있을까.

지금 천수만(충남 서산시)의 간월호에 가면 유유상종의 확실한 ‘실물’을 본다. 멀리 시베리아로부터 날아온 수십만 마리의 가창오리를 비롯한 겨울철새떼. 간월호의 수면과 하늘을 온통 뒤덮는 이 엄청난 수의 새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생긴 놈들끼리 몰려서 예까지 날아왔을까,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개중에는 큰고니(백조), 새오리, 큰기러기, 노랑부리저어새 등도 끼어 있다. 그러나 뒤섞임은 수면에서뿐. 비행중에는 예외없이 유유상종이다.

오전 8시 간월호. 호수는 철새로 뒤덮여 시커멓다. 귀띔이 없다면 철새 무리인 줄도 모르고 지나칠 터. 아니나 다를까. 방조제 도로를 달리던 수많은 차량 가운데 철새를 보기 위해 차를 세운 경우는 두시간 동안 딱 한 대뿐이었다.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서산농장 논길(비포장의 폭넓은 1차로 길)을 달려 모래톱 부근 둑에 올라섰다.

간월호는 ‘역사적’인 인공호수다. 1984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유조선 공법’이라는 희대의 아이디어로 물막이를 성공시켜 조성한 천수만 간척지, 바로 그 곳에 만들어진 호수다. 간척지는 현재 서산농장의 논과 간월호로 나뉘는데 이 호수가 지금은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말까지 60만마리의 철새가 날아드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가 되었다.

오후 4시, 여유

꽥꽥대는 울음소리로 시끄러운 호수에서 갑자기 북 두들기는 듯한 소리가 멀리서 여리게 들려왔다. 동시에 한 무리의 가창오리떼가 멀리서 수면을 박차고 비상했다. 수만마리 오리떼의 날갯짓 소리였다. 하늘로 오른 오리떼. 집단 비행 광경은 마치 벌떼를 연상케 했다. 새카맣게 무리지어 나르던 오리떼는 재빠르게 2, 3회 선회하더니 내리꽂듯 하강해 다시 수면에 내려앉았다.

이런 장관에 취해 호숫가에서 보낸 두 시간. 그동안 오리떼는 십여차례의 크고 작은 에어쇼를 펼쳐 보였다. 그러나 야행성 조류인 오리떼는 대낮에 활동을 쉬기 때문에 더 이상의 비상은 없었다. 다시 호수를 찾은 것은 오후 4시. 농로로 차가 지나자 갈대 우거진 길 아래 도랑에서 자맥질하던 새오리와 추수 끝난 들판에서 낙곡(落穀)을 주워 먹던 큰기러기떼가 여기저기서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오후 6시, 휴식

오후 6시. 서해 낙조가 호수 건너 멀리 안면도 방향의 산악 위 파란 가을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한낮의 휴식을 마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려는 철새떼. 간월호는 수면을 뒤덮은 수십만마리 철새의 울음소리로 장터처럼 소란스러웠다. 그 위 낙조와 노을에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유유히 V자 대형을 이루며 날아가는 기러기떼의 비행. 이리도 아름다운 낙조와 노을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풍경이 언제까지 펼쳐질지…. 함께 있던 한종현씨(천수만습지연구센터 사무국장·서산 서일고 교사)가 걱정스레 말했다. “서산농장 땅이 개인에게 분할 매각됐잖아요. 호수가 철새 낙원이 된 것은 서산농장 덕분인데.”

서산농장은 전국 쌀 생산량의 1%를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 100% 기계화 영농단지여서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낙곡이 많다. 이것이 철새를 불러들인 주원인. 게다가 농장이 울타리 역할을 해 밀렵이나 수질 오염을 막아줘 새들에게는 천연의 요새였던 것.

혹시 올해가 마지막은 아닐지, 내년에도 볼 수 있을지. 간월호 철새의 멋진 낙조비행을 쳐다보던 사람들은 그래서 즐거움보다 근심이 앞섰다.

굴밥

▼식후경▼

굴이 제맛을 내는 것은 역시 찬바람이 난 후. 어리굴젓이 유명한 서산땅까지 갔다가 그 알싸한 굴맛 한 번 제대로 못보고 왔다면 ‘핀잔 받아도 싸다’할 텐데. 찬바람 속에서 철새를 보다가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데 굴밥 만한 것이 없다는 말에 굴밥집을 찾아 나섰다.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이름 뒤에 섬 ‘도(島)’자를 떼지 못한 간월도의 식당촌. 허우대 멀쩡한 전망 좋은 식당도 있건만 발걸음은 자연스레 허름한 토종풍의 ‘사계절 식당’(041-664-3090)으로 향했다. 푸석한 갯가의 은근 투박한 충청도 인심이 그리워서일까. 식당문을 여니 비릿한 바다 냄새가 갯가보다 더하다. 그럴 수밖에. 넉넉한 체구의 서산댁 주인 아주머니가 큰 양동이에 생굴을 담아 바닷물로 씻어내고 있었으니. 굴밥을 시키니 25분을 기다리란다.식당문을 여니 비릿한 바닷냄새.생굴이다. 굴밥(사진)은 생굴을 고명(대추 밤)과 함께 얹어 지은 돌솥밥. 향긋한 굴 냄새가 기름 자르르 흐르는 밥알에 스며들어 입안을 즐겁게 한다. “섬에서 딴 자연산이라야 향이 좋지요.” 주인 김연희씨(40)의 말. 쌀은 철새들이 주워 먹던 서산간척지 것. 천수만 굴은 12월이 돼야 딴다니 다음달에는 천수만 쌀에 천수만 굴을 얹어 지은 ‘천수만 굴밥’이 기다릴 것이다. 1인분 1만원. 그러나 짓기 번거로운 굴밥은 통상 2인분 이상 주문하는 것이 상례. 대신 1인분에 2000원을 깎아 8000원만 받는다. 간월도식 계산법은 이리도 넉넉하다.

지도

▽찾아가기〓서해안고속도로/홍성IC∼굴다리 통과직후 좌회전∼29번 국도(해미방향) 1.2㎞/좌회전∼614번 지방도로 4㎞∼이호삼거리/우회전(이후 계속 서산방조제 A, B지구방향) 9.5㎞∼간월도

▽생태기행 △아이러브투어(www.eilovetour.com)〓25일 천수만의 간월호 탐조여행. 천수만탐조회(www.daum.net/‘다음카페’) 회원들의 현장설명. 어른 1만5000원, 어린이 1만3000원. 신청은 24일까지. 02-734-5677 △와일드버드(www.wildbird.co.kr)〓25일 천수만 탐조여행. 윤무부교수(경희대)의 설명. 어른 3만8000원, 어린이 2만5000원. 02-734-2330

<간월도〓조성하기자>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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