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비경]전남 보성 차밭/싱그런 '초록 세상'

  • 입력 2001년 8월 29일 18시 48분


1500년 전 당나라로 건너와 중국 선종을 연 인도의 고승 달마대사와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 하루는 대사가 참선 중에 졸음이 몰려오자 ‘눈꺼풀이 잠을 불러 들인다’면서 눈꺼풀을떼어내 뒤뜰에 버렸다. 이튿날 그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고 그 잎을 따서 씹으니 금방 머리가 맑아지고 잠이 달아났다고 한다. 다름 아닌 차(茶)나무. 차가 선방 스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을 시사하는 전설이다.

그런 차나무가 산등성 하나를 보기 좋게 뒤덮은 전남 보성의 ‘보성다원’(대한다업 소유·보성읍 봉산리)으로 가는 길(18번 국도). 장골 총각의 다리통처럼 하늘을 향해 힘좋게 쭉쭉 뻗은 삼나무가 도열한 아름다운 길을 지났다. 동틀 무렵 짙은 안개를 뚫고 나무 사이로 달리다 보면 흡사 영화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좋은 착각에 빠질 법도 한 운치 있는 이 길.

산비탈에 일군 거대한 차밭 역시 장대한 삼나무의 숲 안에 있었다. 소소한 이야기 나누며 걸으면 좋을 숲그늘 짙은 숲가의 오솔길. 코 끝에 스친 나무향에 수십년 잊고 지냈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어디서였더라. 맞아 그래, 아 그거.’ 코흘리개 시절 귀히 여기던 향나무 연필, 그 향내였다. 방학도 끝날 이맘때 쯤이면 곱게 깍아 흑심에 침발라 가며 밀린일기 쓰던 그 연필 그 내음….

하늘 가린 숲길이 끝날 즈음 숲 밖 오른 편으로 차밭이 보였다. 초록의 덤불(그렇게 보인다)이 기하학적인 무늬로 도열한 산등성(해발 315∼350m). 무성한 찻잎에 덮여 가지는 볼 수조차 없는 키 90㎝쯤 되는 차나무가 한치의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은 채 일렬로 심어졌다. 계단형의 골은 대충 100개쯤 되어 보였다. 마치 차나무로 등고선을 그린 그 모습은 설치미술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차밭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니 차밭 한가운데 섰다. 우연일까 아니면 일부러 그랬을까. 계단은 108개였다. 하나 하나 밟고 오를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차밭 풍경. 걱정도 108개쯤 사라지면 좋지…. 초록 일색의 싱그러운 차밭에서는 배움도 느낌만큼 많았다. 차밭 가로지르는 유려한 곡선에서는 둥글둥글 세상사는 이치를, 늘 푸른 찻잎에서는 변함없는 항상심을, 잘라도 새잎 내는 차나무에서는 베풂의 미덕을 배운다.

차밭 등성 너머로 가니 삼나무 사이로 굴곡진 자태가 아름다운 비탈길이 보였다. 100가지 설명이 무익하다. 자전거 탄 수녀님이 비구니를 뒤에 태우고 달리던 TV CF, 바로 거기에 나온 곳이라면 대개 알지 않을까.

‘숲을 키우는 것은 희망을 키우는 것입니다.’ 차밭 산등성 아래 ‘녹차방’으로 차 한 잔 마시러 가는 숲길에서 본 이 글. 40여년전 여기에 차밭 일구며 심기 시작한 삼나무가 숲을 이룬 그 울창한 삼림의 입구에 붙어 있었다. 숲과 차밭에서 이제는 희망까지 보여주는 차밭과 숲의 주인(대한다업 장영섭회장·77)의 노고에 머리가 숙여졌다.

차밭 곁에서 마시는 차맛은 또 어떨지. 녹차방에는 통나무 탁자마다 다기 한 구와 우전차(雨前茶)가 한 통씩 놓여 있었다. 첫 찻잎 따는 절기 곡우(穀雨·4월 20일경) 전후에 딴 찻잎으로 만든 보성다원의 우전차는 최상품. 숲 기운과 차밭의 싱그러움 덕인지 한결 맛이 좋았다. 가격은 1인당 1000원, 오전 9시에 문을 연다. 십수년 차밭 가꾸고 차 만들어온 공장장 주용로씨(40). “다원은 찻잎을 생산하는 차밭이지 입장료 내고 구경하는 관광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개는 관광지쯤으로 생각하고 그 중 일부는 찻잎을 함부로 따거나 음식 술을 가지고 차밭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주씨는 차밭을 둘러보고 차 한 잔 음미하며 향기로운 차의 성정을 배우고 돌아가는 감상있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한다업㈜ http://www.daehantea.co.kr 보성다원 061-852-2593

차(茶)로 시작한 여행, 차(茶)로 끝내는 것은 어떨지. 보성다원을 나와 봇재 넘어(18번 국도) 남쪽해안으로 남행(지방도 845번)하면 율포다. 고흥과 장흥, 두 돌출지형에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보성만. 거기에 자리잡은 갯마을 율포가 요즘 ‘해수·녹차탕’으로 ‘떴다’. 지하 120m에서 뽑아올린 소금지하수에 찻잎을 넣고 차 성분을 우려낸 건강보양탕인데 실내에는 해수온탕 냉탕도 있다. 녹차의 효용이 피부를 통해 흡수된다니 듣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 진다. 해수녹차탕(http://www.boseong.chonnam.kr·061-853-4566) 이용료는 5000원(어린이 3000원). 개장 오전 6시∼오후 8시.

▼맛집/율포 '갯마을 횟집'▼

율포의 가을은 전어와 함께 시작된다.

지난 주말, 율포(보성군 회천면 동률리)에 들렀다 은빛 비늘 찬란한 전어떼를 만났다. 물론 수족관이지만. ‘아니 벌써.’ 늦더위 땡볕 폭염에 가을은 생각할 엄두조차 못내는 이 때에 ‘가을 전어’라니.

한참 수족관을 들여다 보다 갯마을 횟집으로 들어갔다. 주인 김화자씨(46)는 전어를 다듬느라 눈길조차 주지 못했다. 잡히기 시작했다는 ‘가을 전어’ 시즌오픈 소식을 듣고 만사 제치고 율포까지 달려온 성마른 미식가가 식당에 포진한 탓.

“벌써라뇨. 작년보다 닷새 늦었는데.”매년 잡히는 날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전어 도사’ 김씨. 아직 맛이 덜 들었다며 “이번 주말부터가 진짜 시즌”이라고 말했다. ‘가을 전어 머리에는 깨가 서말.’ 고소한 맛이 일품인 전어는 회로, 구이로 먹는다. 통유리창으로 보성만 바다가 ‘왕창’ 내다 보이는 창가에서 올 첫 전어회를 맛 보았다.

상에 오른 회요리는 두가지. 된장에 찍어먹는 맨산 회와 야채와 함께 넣고 초고추장으로 비벼낸 벌건 회무침. 전어회는 상추나 깻잎에 고추 마늘을 얹어 입이 터질 만큼 큼직하게 쌈으로 싸서 먹어야 제 맛이다. 전어는 구이도 별미다. 그 냄새가 얼마나 고소한지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갯마을 횟집의 전어회 맛은 다른 집과 달랐다. 회는 뼈를 발라낸 살과 여린 가시(꼬리부분)가 약간 있는 살로 내어 육질이 부드럽고 그 덕에 고소함도 더했다. 가시가 없어서 그런지 이 식당에는 가족이 많았다. 그러나 진미는 회무침에 있었다. 비결은 식초. “친정에서 늘 하던 대로 만든 자연초만 씁니다.”

김씨의 설명은 이렇다. 키위와 매실을 설탕에 삭힌(3년) 후 여기에 막걸리를 부어 20일쯤 묵혀 두면 흰 앙금이 가라 앉고 그 위에 맑은 물이 뜨는 데 이것이 천연 과일식초라는 것. 이 집 회무침은 모두 이 식초로 버무려 낸 것인데 전어살에 식초가 착착 배어 육질의 씹히는 맛과 고소함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 식초는 식당 밖 장독대에서 볼 수 있다. 회(무침 포함)는 2, 3인분 한 접시에 2만원. 바다 냄새 상큼한 율포갯벌 바지락 조개탕은 덤.갯마을횟집은 해수녹차탕 부근 해수욕장의 송림가에 있다. 061-852-8103, 061-853-8103

<보성·율포〓조성하기자>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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