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으로]이승우의 '나는 아주 오래…'

  • 입력 2000년 9월 29일 18시 41분


경제위기로 인한 이른바 20대 80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우리 사회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숱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 IMF사태로 인해서 부도를 맞은 사람, 직장을 잃은 사람, 가족 간의 신뢰를 잃은 사람들, 미래의 희망을 잃은 사람. 역사의 어느 시기이든지 그러한 사람들이 존재했겠지만 최근 2,3년 간은 절망의 끝을 보아버린 사람들이 특히 많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좌절한 자의 상처와 영광’에 대한 묘사를 통해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들의 상처와 내면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것도 문학의 소중한 역할이리라. 이러한 의미에서 이승우의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문학사상 10월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세상과 타자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칩거 형태의 자폐증에 빠져버린 주인공의 내면과 행태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문학적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자신이 운영하던 기업을 완전히 거덜내 버린 사내가 있다. 노조와 채권단으로부터 모욕까지 받으면서 회사를 빼앗긴 그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에게 이러한 극심한 변화는 불면증과 자폐증,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동반한다. 이러한 심리적 공황을 탈피하기 위해서 아내와 함께 떠난 단체여행에서, 그는 참으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일행에서 떨어져 혼자 산 속을 걸어가던 그는 우연히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몸을 누이게 된다. 불면증에 걸린 그가 실종 소동을 일으킬 만큼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홀로 떨어져, 산 속의 동굴에서 네 시간 동안이나 편안한 수면을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공간에 제대로 들어앉은 듯한 친밀감.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정말로 언젠가 한 번 그 동굴에 간 적이 있는 것일까”라는 사내의 자문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완벽히 차단한 고립된 장소가 그에게는 가장 편안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는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스스로를 유폐시키고자 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세태고발 소설을 탈피하여, 정교한 정신분석학적 고찰과 모티프 분석이 요구되는 섬세한 심리소설로 화하는 것은 그 자폐적 행동의 심리적 원형을 추적하는 대목에 이르러서이다. 유년시절, 술에 취할 때마다 난폭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서 벽장 속의 뒤주 속에 숨곤 하던 아픈 체험이 바로 동굴 속에서의 편안한 느낌으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뒤주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근육과 신경이 이상스레 느슨해지면서 기분 좋은 안락감이 찾아왔다. 그럴 때 나는 어김없이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대목은 바로 그가 좁은 동굴에서 느꼈던 안정감의 심리적 뿌리인 것이다.

뒤주와 동굴의 상상력을 통해, 외부의 폭력과 세상의 상처로부터 탈피하려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이 소설은 이제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칩거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칩거 자체가 하나의 자율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목수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기술을 활용하여 그가 최종적으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그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기묘한 직육면체 형태의 나무통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무엇보다도 ‘밖에 있을 때는 살 희망이 생기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가면 그런 생각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주―동굴―나무통으로 이어지는 그의 칩거의 여정은, 동굴의 모티프를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유배당한 사람들의 처절한 내면정경을 아프게, 안타깝게 보여준다. 그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와 따뜻한 햇볕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 나는 아주 오래… / 이승우 지음 / 문학사상

권성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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