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에세이/김학기]단풍 小考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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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기 강릉원주대 식물생명과학과 명예교수
김학기 강릉원주대 식물생명과학과 명예교수
만추의 교정에 가을볕이 따사롭다. 빨강 노랑 초록이 어우러진 가을빛은 계절의 축복이다. 사과 감 배의 성숙과 황금들판의 결실도 그러하다. 자연을 찾는 가을 객은 이 풍요와 정취를 마치 자신들을 위한 잔치로 착각한다. 그러면 또 어떠랴, 사람들은 만물의 영장이고 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자만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무섭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쌀쌀한 바람에 떨고 있는 단풍잎은 한없이 힘들고 서글퍼 보이기도 한다. 같은 하늘, 같은 단풍도 청춘에게는 축복이겠지만 노약하고 우울한 사람에게는 스산한 바람에 떠는 애절함이다.

정작 가을이 선사하는 단풍이나 황금빛 결실은 사람의 감정과는 전혀 무관하다. 식물은 청명한 가을 날씨를 바탕으로 따뜻한 낮에는 충분한 광합성을 하고 기온이 낮은 밤에는 당류의 소비를 줄이고 잎과 열매에 저장함으로써 2차 대사물질인 적황색소(빨강, 노랑, 주황)를 만들어 과실과 단풍을 곱게 표출한다. 잎이 당을 축적하면 동해(凍害)를 경감할 수 있고, 열매에 당이 충만하면 종자가 충실해진다. 가을색이 아름다울수록 식물이 건강하고 건강한 종자와 건강한 후대를 보장한다.

숲을 인간에 비견해 볼 때 푸름은 몸, 노랑 빨강은 경륜을 통해 쌓아올린 지성과 사유의 성숙함인 듯하여 그 어울림이 더욱 아름답고 건실해 보인다. 늙은 잎은 고운 단풍으로 단장하고 미풍과 함께 내려앉아 후대의 자양분이 되는 아름답고 멋진 마감을 한다. 늙고 병들어 고통 속에 살다 가는 사람보다 평화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한 세상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공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아니함)과 구동존이(求同存異·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같은 점을 추구함)로 가르치지 않았는가. 서로 다름을 넘어 녹(綠), 홍(紅), 황(黃), 주(朱)의 하모니를 시현하며 살아 움직이는 단풍 숲을 바라보며 우리는 오만함을 버리고 숙연히 반성해 볼 일이다.

황혼에 들어선 오늘, 문득 가을처럼 살다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함께한 인연들 앞에 따사로운 햇살과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단풍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일이 그렇고, 가을의 결실처럼 이웃에 베풀고 갈 일이 그렇다. 인생에 있어 끝맺음을 잘하는 일은 그야말로 최선일 터이다.

김학기 강릉원주대 식물생명과학과 명예교수
#단풍#만추#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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