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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스포츠

[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34> 아시아의 슛도사 이충희

입력 2015-01-19 03:00업데이트 2015-01-19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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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슈터? 매일 슛 1000개 넣을때까지 연습”
사람들은 한때 그를 ‘신사수(神射手)’라고 불렀다. 신이 내린 슈터라는 의미였다. 1980년대 아시아를 주름잡던 이충희 씨(56) 얘기다. 하지만 지난해 1월 프로농구 동부 감독에서 중도하차한 뒤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그를 다시 부른 건 세상이었다.
○ “소질 없다” 농구부서 두번 쫓겨나

이 씨는 새해 들어 TV 농구 해설가로 활동을 재개한 데 이어 최근 올스타전에 초청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문경은 SK 감독(44)과 전설의 슈터 대결에서 이겨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올스타전 다음 날인 12일 서울 송파구의 한 카페에서 이 씨를 만났다. 인터뷰 도중 기자는 같은 장소로 국제아이스하키연맹 관계자들과 미팅을 하러 온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한 고위 관리와 마주쳤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이충희 씨 팬인데 영광”이라고 말하는 그 관리를 위해 기자는 기념사진 촬영을 주선했다. 렌즈에 보이는 그 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슛도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 감독이 처음부터 명성을 얻은 건 아니었다. “난 노력형이다. 송도중학교 1학년 때 농구부에 들어갔는데 소질이 없다고 두 번 쫓겨났다.” 그는 중학 3학년 말에 10개월 동안 매일 슈팅 1000개를 성공시킨 뒤에야 그날 훈련을 마쳤다. “점심은 5분 만에 먹고 300∼400개를 쐈다. 새벽, 야간에도 던졌다. 그것도 가장 까다로운 위치인 오른쪽 코너에서만 연습했다.”

혹독한 훈련의 대가는 달콤했다. 송도고 졸업반 때 전국체육대회에서 50점을 넣었던 그는 고려대 입학 후 49연승을 이끌더니 현대 삼성의 스카우트 전쟁에 휘말렸다. 승자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시로 물량 공세를 펼친 현대였다. 이 씨는 “1981년 현대에 입단할 때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 한 채와 스포츠센터, 현금 등을 받았다”고 했다. 스카우트 금액을 묻자 머뭇거리더니 “당시 30평짜리 강남 아파트를 20채 넘게 살 수 있었다. 한 채에 3000만 원 하던 시절”이라고 했다.

현대 시절에도 이 씨는 차로 1시간 거리인 숙소와 훈련장을 자주 뛰어다녔다. “살이 찐 것 같다”는 감독의 질책에 대관령을 구보로 넘기도 했던 그는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 두번 경질… 고개 숙인 지도자

선수 시절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당시 어머니가 우편배달부에게 고생한다며 1만 원씩 주곤 했다. 집으로 하루에 1000통 이상의 팬레터가 왔기 때문이다. 유행하던 종이학 선물은 아마 수십만 마리 받았을 것이다.”

그런 그도 지도자로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LG 창단 감독을 맡아 지도력을 발휘하긴 했어도 2007년 오리온스 감독 취임 후 7개월 만에 경질된 데 이어 6년 만인 2013년 동부 지휘봉을 잡았으나 다시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관중 시위까지 당한 끝에 물러났다. 두 번 모두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퇴한 과거를 떠올리는 그의 표정은 굳어졌다. 이 씨는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결국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한다”고 했다.

‘내 탓’임을 강조했지만 이 씨가 날개를 제대로 펴기에는 외풍도 심했다. 오리온스와 동부는 코치 구성에서 이 씨의 의견을 배제해 인사 문제가 지적된 데다 외국인 선수를 비롯한 주전들의 연이은 부상에 시달렸다. 엘리트 코스만 밟은 이 씨가 자신을 향한 팬들의 비난이 인신공격 차원으로 변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다.
○ 농구 위해 뭐라도 하겠다

이 씨는 최근 탤런트인 아내 최란 씨와 요실금 팬티의 TV CF 모델로 등장했다. 평소 소문난 원앙부부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는 평가 속에 코트를 호령하던 이 씨의 이미지를 기억하던 팬들은 아쉽다는 반응도 보였다. 이 씨는 “예전부터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활동을 하고 있는데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광고에 나섰다. 다음 달에 2탄을 찍는다”며 웃었다.

이 CF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먼저 입었다”고 말하는 이 씨는 인터뷰를 마무리할 무렵 “아내가 농구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 안타까움이 커서였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가 다시 농구를 보고 있더라. 농구가 내 삶인 것 같다”고 했다. 그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명예회복이라는 단어는 이미 초월한 듯 보였다. 다만 농구를 향한 애정만이 차고 넘쳤다. “나를 내려놓았더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농구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하겠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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