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신 PD의 반상일기]신예 여성고수들 반상의 중심에 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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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신화에 곧잘 등장하는 모티브 중 하나가 ‘신표(信標) 맞추기’다. 갖은 위기와 시련 끝에 주인공이 두 동강 난 청동검을 맞추어 진정한 영웅임을 증명하고 대업을 이룬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한국바둑이 똑같은 신화를 썼다. 혼성페어에 출전한 이슬아 초단이 박정환 8단과 호흡을 맞춰 한국에 첫 번째 금메달을 선사했고 여자단체전의 이민진 5단이 세 번째 금메달을 맞춰내 남자기사들과 바둑 전 종목 석권을 합작해냈다. 열세로 평가되던 여자바둑이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낸 것이다.

올해 바둑계를 되돌아보면 샛별 같은 여자기사들이 먼저 떠오른다.

박지연 2단은 제15회 삼성화재배에서 중국의 차세대 강호 퉈자시 3단을 압도하며 국내 출신 여자기사 최초로 세계대회 16강 고지를 밟았다.

김윤영 2단은 제4회 여류기성전에서 전관왕 루이나이웨이 9단을 8강전에서 따돌리고 박 2단과의 자매대결 끝에 우승컵을 안았다. 김 2단의 우승은 1999년 이후 10년 넘게 이어지던 루이-박지은-조혜연의 3각 구도를 깬 세대교체의 신호탄이었다.

이슬아 초단은 제4회 지지옥션배에서 서봉수 9단을 비롯한 시니어 기사들에게 3연승하며 위기일발의 여류팀을 구했다. 여세를 몰아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 2개를 목에 걸며 최고의 실력파 ‘얼짱’으로 등극했다. 이민진 5단은 아시아경기에서 루이 9단과 숙명의 대결을 펼쳐 대역전극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그녀는 평소 인터뷰에서 “중국 대표선수 중에서 루이 9단이 가장 쉬워요”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팬들은 경기가 끝나고서야 그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큰 무대에 강한 ‘맏언니’의 카리스마에 열광했다.

여자기사들의 급성장을 보면서 반가운 것은 예전과 비교가 안될 만큼 기사 층이 두꺼워졌다는 점이다. 아직 루이-박지은-조혜연의 존재감이 크지만 여자상비군 제도를 시행하고 아시아경기 무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신예 기사들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 이제는 여자바둑계에도 실력을 겸비한 스타급 기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또 여자기사들이 바둑 알리기에 누구보다 열성적인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군부대 바둑보급에 앞장서왔고 지역 기우회 행사가 있는 날이면 천릿길을 마다 않고 달렸다. 여자바둑은 전투적이어서 일반 팬들의 바둑과도 닮은 면이 많아 친근하다.

올해 여자바둑은 일취월장한 실력과 열정적 보급을 통해 중앙으로 한 칸 크게 뛰었다. 지금까지 남자바둑에 가려 변방으로 치부됐던 여자바둑이 아시아경기를 계기로 한국바둑의 진정한 ‘반쪽’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여걸들의 청동검이 녹슬지 않도록 멋진 무대만 마련된다면 흥행의 3박자가 갖춰지는 셈이다. 새로운 여자대회와 페어대회가 이어지길 바란다.

이세신 바둑TV 편성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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