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신 PD의 반상일기]앞 안보여도 수읽기 척척 점자바둑, 그 상상의 세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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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바둑TV 스튜디오에서 한국과 일본 시각장애인의 특별한 대국이 펼쳐졌다. 한국의 송중택 아마 6단과 일본의 가키시마 미쓰하루 아마 3단이 점자바둑 대결을 벌인 것이다. 점자바둑판은 일반 바둑판과 달리 양각의 19로 교차점에 십자형으로 음각된 바둑돌을 끼우게 고안된 것이다. 흑 돌엔 볼록한 점이 있어 백돌과 구별한다. 재질은 플라스틱인데 아직 일본에서만 생산한다. 이들은 돌을 더듬어 상대가 놓은 돌을 확인했다. 번갈아 한 번씩 손이 오가는 깔끔한 일반 대국과 달랐다. 한 수씩 두되 두 사람의 네 손이 서로 만났다. 석 점 접바둑을 마친 송 6단은 일본 친구의 손을 이끌어 만년패가 날 수 있었던 귀의 변화를 복기했다. 말 그대로 손의 대화, ‘수담(手談)’이었다.

말 없이도 통하고 근력이나 시력이 없어도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둑이다. 신체적 장애까지 아우르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열어주는 데에 바둑의 숨은 매력이 있다. 극적인 예가 ‘암흑대결’이다. 중국 당나라 때 고부(姑婦)가 말로만 바둑 두는 것을 들었다는 왕적신의 고사를 재현하고자 몇 년 전에 시도됐다. 여기에 적지 않은 프로기사들이 도전했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착수점을 부르면 보조원이 바둑판에 돌을 놓아주는 식으로 대결이 진행된다.

목진석 9단이 천재 신인으로 이름을 알리던 시절, 121수까지 안대를 풀지 않고 대국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흑백 돌을 번갈아 쓰지 않고 한 가지 색으로만 두는 ‘일색대결’도 있다. 얼마 가지 않아 반상은 온통 흰색이나 검은색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실력자들도 눈 뜬 장님이 되고 만다. 2002년에 일색대결을 벌였던 안달훈 5단과 이현욱 4단은 한 번도 기보를 들여다보지 않고 승부를 끝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마치 흑과 백으로 대국하는 것 같았다.

바둑판 앞에서 눈을 감아본다. 어둠 속에서의 바둑 한 판이란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썰기’보다 한참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엔 엄청난 집중력과 상상력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있으면 바둑이 장애를 뛰어넘는 묘수를 찾아준다. 순수 좌표의 세계가 때로는 눈이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보게 한다. 송중택 씨는 시력을 잃고 바둑을 전혀 두지 못할 것이라 여겼는데 일본 바둑인이 구해준 점자바둑판을 만져보는 순간 ‘아, 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들은 좌표판에 수나 도형을 대입하는 형태로 수학 공부를 하는데 손끝으로 전해오는 바둑판의 느낌이 수학 수업에서의 원리와 통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다고 한다. “바둑판 앞에서는 나도 비장애인”이라며 함박웃음을 짓는 그다. 겉으로 드러난 세계 그 너머를 응시하는 시각장애인들의 심안(心眼)에 바둑의 저력이 있다. ‘반전무맹(盤前無盲)’의 경지. 그들이야말로 바둑의 궁극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탐험가들이다.

이세신 바둑TV 편성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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