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포천 명성산 억새밭에서 노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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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눈물 삭히고 삭혀 하얗게 바래버린 ‘울음산 억새꽃’

명성산 억새꽃이 여린 바람결에 가늘게 흐느낀다. 서로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훌쩍 울먹인다.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은’(최승호 시인) 은빛 억새밭이 너울너울 일렁인다. 억새는 막 피어나는 요즘의 꽃이 으뜸이다. 올들어 다섯 번째 명성산을 찾는다는 박정인 씨(44)는 “푸른 하늘과 하얀 억새꽃이 어우러져 환상적이다. 눈부신 은빛너울에 살짝 푸른빛까지 스며들어 풋풋하면서도 고혹적이다”라고 말했다. 억새꽃은 해가 뜨고 질 때, 빗긴 햇살에 보는 게 황홀하다. 한순간 은빛너울이 붉은 물결로 바뀌어 출렁인다. 산잔등에 바늘처럼 꽂혀 있는 황금새털들이 ‘쏴아! 쏴아!’ 일제히 푸드득거린다. 포천 명성산=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명성산 억새꽃이 여린 바람결에 가늘게 흐느낀다. 서로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훌쩍 울먹인다.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은’(최승호 시인) 은빛 억새밭이 너울너울 일렁인다. 억새는 막 피어나는 요즘의 꽃이 으뜸이다. 올들어 다섯 번째 명성산을 찾는다는 박정인 씨(44)는 “푸른 하늘과 하얀 억새꽃이 어우러져 환상적이다. 눈부신 은빛너울에 살짝 푸른빛까지 스며들어 풋풋하면서도 고혹적이다”라고 말했다. 억새꽃은 해가 뜨고 질 때, 빗긴 햇살에 보는 게 황홀하다. 한순간 은빛너울이 붉은 물결로 바뀌어 출렁인다. 산잔등에 바늘처럼 꽂혀 있는 황금새털들이 ‘쏴아! 쏴아!’ 일제히 푸드득거린다. 포천 명성산=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억새꽃 다발은
사랑하는 이에게는
보내지 마셔요

다만 그대를
가을들녘에 두고 떠난 이의
뒷모습에 보내셔요

마디마디 피가 맺힌
하얀 억새꽃

불같은 미움도 삭혔습니다
잠 못 드는 그리움도 삭혔습니다
솟구치는 눈물도 삭혔습니다

삭히고 삭혀서
하얗게 바래어 피었습니다
떠난 이의 그 호젓한 뒷모습에
아직도 가을이 남아 있거든
억새꽃 다발을 보내셔요
한 아름 가득 보내셔요

- 김순이 ‘억새의 노래’ 전문


경기 포천 울음산(명성산)에 하얀 억새꽃이 가득 피었다. 풋풋한 은빛 꽃들이 우우우 돋아나고 있다. 산잔등 억새밭은 별 부스러기를 뿌려놓은 듯 눈부시다. 그 너머엔 푸른 하늘이 유리창처럼 투명하다. 돌을 던지면 금방이라도 쨍그랑 깨질 것 같다. 오를수록 하늘이 점점 커진다. 억새밭은 반공중에 두둥실 걸려 있다. 명성산 등짝 너머 뭉게구름이 쫑긋 두 귀를 내놓고 배시시 웃는다.

명성산(鳴聲山·923m)은 궁예(?∼918)의 한이 서린 산이다. 왕건에게 패하면서 진한 울음을 울었다는 곳이다. 궁예의 부대는 대부분 미륵세상을 꿈꾸던 농민군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통곡하며 부대를 해산했다. 곳곳에 그의 흔적이 땅이름으로 남았다. 패전 궁예군사들에게 항서를 받았다는 ‘항서받골’, 궁예가 홀로 패주하며 지나갔다는 ‘가는골(패주골)’, 궁예가 흐느끼며 넘었다는 ‘느치고개(눌치)’, 궁예가 은신했다는 ‘궁예왕굴’….

명성산 억새밭은 8∼9분 능선에 걸쳐 있다. 산정호수에서 등룡폭포 쪽으로 오르는 게 보통이다. 느릿느릿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햇볕이 바스락거린다. 오른쪽 계곡물 소리가 싱그럽다. 다만 흐린 물이 옥에 티다. 우렁차게 떨어지는 2단 등룡폭포도 낙숫물이 흙빛이라 영 찜찜하다. 모두 인근 군 훈련장의 포사격 탓이다. 자인사 코스는 험하다. 내려올 때 이쪽으로 하산하는 게 낫다. 산정호수(둘레길 3.5km)를 발아래 굽어볼 수 있어 좋다. 억새밭은 책을 펼쳐놓은 듯 양 기슭으로 갈라졌다. 20ha(약 6만 평)의 억새꽃이 가르마길 사이로 나뉘었다. 사방 풀벌레 울음소리가 한갓지다. 물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군데군데 서있는 게 이채롭다. 정상 가까이인데도 샘물(궁예약수)이 솟는다. 이곳이 습지라는 증거다.

억새꽃 틈새로 하얀 구절초꽃이 우아하게 웃는다. 연보라 쑥부쟁이꽃도 수줍게 피었다. 노란 미역취꽃과 연노랑 고들빼기꽃이 하늘거린다. 껑충 큰 보랏빛 고려엉겅퀴꽃(곤드레나물)과 노란 마타리꽃이 푸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오호라, 이건 뭔가. 샛노란 뚱딴지꽃(돼지감자꽃)이 생뚱맞게 빙글거리고 있다. 영락없는 ‘작은 해바라기꽃’이다. 문득 노란 감국꽃 향이 콧속에 물씬 스며든다. 단풍은 이제 막 시작이다.

억새밭 너머로 붉은 해가 걸린다. 억새꽃이 발그레 물든다. 출렁출렁 금빛너울이 춤춘다. 빨간 고추잠자리떼가 빙빙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돈다. 여린 억새꽃들이 가늘게 흐느낀다. 어깨를 들썩이며 속울음을 운다. 궁예의 피울음인가. 산 아래 산정호수(26ha·약 7만8000평)가 외눈박이 궁예의 눈알처럼 붉게 충혈 됐다. 그렇다. 억새밭이 울먹이면, 산정호수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억새와 갈대의 차이는?

억새(왼쪽)와 갈대. 동아일보DB
억새(왼쪽)와 갈대. 동아일보DB
갈대가 ‘억센 사내’라면 억새는 ‘조신한 여성’이다. 생김새로만 본다면 갈대는 결코 ‘여자의 마음’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갈대는 사람보다 훨씬 키가 크다(3m). 갈대꽃은 서로 덩어리져 덕지덕지 엉겨 핀다. 마치 까치집 지은 광대머리처럼 부스스하다. 부얼부얼 봉두난발이다. 더부룩한 텁석부리수염이다. 이삭이 익으면 술 취한 사람처럼 고개가 축 처져 볼썽사납기까지 하다.

억새꽃은 은발신사 머리처럼 가지런하고 단정하다. 줄기가 여리어 모시바람에도 가늘게 떤다.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보다간 큰 코 다친다. 잎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날카로워 살이 스치기라도 하면 감쪽같이 베인다. 잎엔 어린애 실핏줄처럼 흰 잎맥이 나 있어 애틋하다. 키도 사람과 거의 같거나 작다(1∼2m). 열매가 익어도 살짝 고개를 숙일 뿐이다.

억새와 갈대는 사촌형제쯤 된다. 같은 벼과의 여러해살이풀 한 집안이다. 억새는 산잔등이나 둑길 등 주로 뭍에서 자란다. 갈대는 바닷가나 강가의 물가를 떠나지 못한다. 억새는 물가에서도 자라지만, 갈대는 산자락에서 살지 못한다.

억새줄기는 가늘지만 속이 꽉 차 있다. 야무지고 똑똑한 현대여성 닮았다. 갈대 줄기는 속이 텅 비어 있다. 마치 덩치만 커다란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 같다. 바람이 불면 억새는 질금질금 흐느껴 운다. 사락사락 ‘으악새 슬피’ 운다.

갈대는 온몸을 서로 부비며 서걱서걱 운다. 우걱우걱 가슴속으로 구슬피 운다. 왜 우는지도 모른 채 그냥 몸부림친다. 아마도 뼈가 시리도록 외로워서 우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갈대는 남자고, 억새는 여자다.

▼ 최익현 선생 생가터엔 대쪽선비의 불호령 들리는 듯 ▼

포천은 한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의 고향이다. 신북면 가채리 경주 최씨 집성촌이 바로 그곳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사내아이’라는 뜻의 ‘奇男(기남)’이라고 불렸다. 그만큼 총명했고, 경기 양평의 화서 이항로 선생(1792∼1868)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자로 우뚝 섰다.

그는 ‘천하의 고집불통 대쪽선비’ 그 자체였다. 1868년 당시 서슬 퍼렇던 대원군에게 ‘경복궁 복원공사 중단’을 요구한 것이나, 연이어 서원 철폐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집권층의 부패를 낱낱이 지적한 것이 그 좋은 예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땐 도끼를 지니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그 부당함을 외쳤다. 바로 그 유명한 ‘도끼상소’다. 하지만 돌아온 건 흑산도 귀양살이.

최익현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20여 년 동안 고향 가채리에 머물며 1895년 단발령 폐지 요구, 1905년 을사오적 처단 등 줄기차게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그게 통할 리 만무했다. 1906년 결국 그는 일흔셋의 늙은 몸으로 항일의병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끝내 일본 헌병대에 잡혀 일본 대마도로 끌려갔다.

최익현은 부산 앞바다에서 버선에 모래를 채웠다. 결코 왜놈의 땅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대마도에서도 모든 물과 음식을 거절하다가 장렬하게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이 부산에 도착하자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슬퍼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노제를 지냈다. 일제는 시신을 충남 논산에 가매장하도록 했다. 구름 추모인파에 불안했던 것이다. 최익현의 시신은 2년여 후에야 예산에 안장될 수 있었다. 고향 가채리엔 그의 생가터 비와 그의 손자 독립투사 최면식(1891∼1944)의 공적비가 서 있다.

▼ 억새밭 빨간 우체통에 사연 넣으면 1년후 배달 ▼
명성산억새꽃축제 27일까지

포천 명성산억새꽃축제(10월 9∼27일)는 다채롭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억새밭 잔등 팔각정에서 청아한 경기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하면 신나는 사물놀이가 펼쳐지기도 한다. 에어로빅, 댄스스포츠, 어쿠스틱밴드도 한데 어우러진다. 억새밭 오르는 중간 등룡폭포에선 농악대가 한마당 놀고 색소폰이 애간장을 녹이며 흐느낀다. 산정호수무대에선 억새노래자랑, 아프리카민속공연, 밸리댄스, 미2사단 군악공연을 볼 수 있다. 억새밭에는 ‘1년 후에 받는 편지’ 빨간 우체통이 눈에 띈다. 사연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정확히 1년 뒤에 배달된다. 포천우체국(국장 박은수)은 1905년에 세워진 한강 이북의 몇 안 되는 ‘오래된 우체국’(031-532-0004, www.koreapost.go.kr/gi/487).

10월은 ‘억새의 달’이다. 곳곳에서 억새잔치가 한창이다. 강원 정선 민둥산억새축제(9월 27일∼11월 3일)와 울산 영남알프스억새축제(10월 6∼27일)는 이미 개막됐고 서울하늘공원억새축제(10월 18∼27일)도 곧 열린다.

■Travel Info

♣포천 아트밸리=‘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포천 아트밸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트밸리는 폐석장의 돌산을 리모델링해 멋진 복합문화동산으로 탈바꿈한 곳.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화강암을 생산하던 버려진 흉물 채석장을 갈고 닦아 번듯한 예술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야외돌조각공원은 물론이고 천문대, 호수, 야외공연장 등 ‘삐까번쩍’ 현대식 예술 공간이 됐다. 031-538-3484, www.artvalley.or.kr

♣포천농산물축제 한마당=포천은 단연 막걸리가 이름났다. 일동막걸리, 이동막걸리, 내촌막걸리, 포천막걸리 등 어디든 맛이 좋다. 배상면주가도 포천에 있다. 포천이동갈비, 포천파주골순두부, 포천신북오리구이, 포천자연산우렁, 포천자연산버섯, 포천한우, 포천내촌포도, 포천사과, 포천돼지고기, 포천한과 등도 입소문이 났다. 10월 17∼19일까지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2013 포천농산물축제 한마당’에서 직접 맛볼 수 있다. 031-538-2331∼2

▼교통 ▽승용차=서울→동부간선도로→의정부→포천(42km), 서울→퇴계원나들목→내촌→포천(36km) ▽시외버스=동서울터미널→포천, 서울지하철 1호선→의정부(의정부에서 포천행 시외버스)

▼먹을거리=△산비탈손두부(031-534-3992) △솟대이동갈비(031-533-5596) △이동폭포갈비(031-531-4415) △원조이동동원갈비(031-534-9922) △포천한우마을(031-535-2219) △옛고을민물고기매운탕(031-532-6238) △중앙매운탕(031-532-6120) △이모네우렁된장찌개(031-534-6173) △신안토종닭백숙(031-533-9407) △가는골쌈밥(031-533-2737) △다리목산채비빔밥(031-533-2750) △등산로가든손두부전골(031-532-6235) △모내기쌈밥(031-535-0960)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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