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하늘의 들꽃정원’ 곰배령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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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랑 샐쭉 다보록 우르르… 곰배령 들꽃들이 춤을 춥니다

22일 점봉산 곰배령은 아직 이른 봄이었다. 이제야 풀꽃들이 우우우 기지개를 켜고, 나뭇잎들은 연둣빛 새풀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풀밭은 겨우내 배고픈 멧돼지들이 휘뚜루마뚜루 온통 들쑤셔놓아 놀란흙들로 어질더분했다. 멧돼지들은 풀뿌리와 그 속에서 더부살이하던 벌레들로 눈물의 보릿고개를 넘었다. 풀꽃들은 뒤집어진 놀란흙에서도 뿌리를 박고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얀 냉이꽃과 청순한 홀아비바람꽃이 바람에 하늘하늘 생긋거렸다. 푸른 현호색도 아항! 하품을 하며 꽃잎을 열었다. 노란 피나물꽃도 벌떼처럼 산기슭을 수놓았다. 들꽃세상, 풀꽃나라. 곰배령은 봄꽃천국의 문을 열고 있었다. 인제 점봉산 곰배령=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22일 점봉산 곰배령은 아직 이른 봄이었다. 이제야 풀꽃들이 우우우 기지개를 켜고, 나뭇잎들은 연둣빛 새풀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풀밭은 겨우내 배고픈 멧돼지들이 휘뚜루마뚜루 온통 들쑤셔놓아 놀란흙들로 어질더분했다. 멧돼지들은 풀뿌리와 그 속에서 더부살이하던 벌레들로 눈물의 보릿고개를 넘었다. 풀꽃들은 뒤집어진 놀란흙에서도 뿌리를 박고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얀 냉이꽃과 청순한 홀아비바람꽃이 바람에 하늘하늘 생긋거렸다. 푸른 현호색도 아항! 하품을 하며 꽃잎을 열었다. 노란 피나물꽃도 벌떼처럼 산기슭을 수놓았다. 들꽃세상, 풀꽃나라. 곰배령은 봄꽃천국의 문을 열고 있었다. 인제 점봉산 곰배령=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점봉산 가는 길

오늘은 곰배령까지만 간다 거기

지천으로 피었다 동자꽃

동자꽃 안주하여 술 한 잔 마신다

나도 마시고 안개도 마신다

물봉선도 취하고 노루귀도 취하고 바람꽃도 취한다

묻는다. 세상은 왜

감탄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냐고

없는 것이냐고
마을로 내려와 안개를 토했다

(권혁소의 ‘곰배령’ 전문)


위로부터 현호색, 홀아비바람꽃, 피나물, 미나리냉이꽃.
위로부터 현호색, 홀아비바람꽃, 피나물, 미나리냉이꽃.
강원 인제 점봉산 곰배령(1164m)에 마침내 봄이 왔다. 나무마다 연두색 나뭇잎이 우우우 돋는다. 흰 홀아비바람꽃이 하늘하늘 샐쭉거린다. 하얀 냉이꽃은 촐랑촐랑 지천이다. 피나물꽃은 곰배령 턱밑 풀밭에 노란 단추처럼 다보록다보록 무수히 박혀 있다. 줄기를 꺾으면, 진한 붉은 피가 아니라 연한 핏물이 스며 나온다. 아직 덜 자랐다는 증거다.

그늘진 큰나무 밑엔 보랏빛 얼레지꽃이 매가리 없는 얼굴로 시름시름 시르죽었다. 푸른 현호색꽃들은 우르르 씩씩하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너른 풀밭은 멧돼지들이 온통 휘뚜루마뚜루 들쑤셔 놓아 놀란 흙들로 울뚝불뚝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틈새로 들꽃들은 억세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나무 덱 위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바람이 살랑살랑 나른하다.

곰배령 아랫마을 설피밭(700m) 계곡엔 하얀 야광나무꽃이 숙지고 있다. 그래도 밤에는 희번지르르하게 ‘야광’을 뿜어낸다. 노란 산괴불주머니들도 기세등등하다. ‘깨 점박이’ 하얀 개별꽃들은 옹종망종 깜찍하게 피었다. 푸른 벌깨덩굴꽃이 하나둘 이우는 찰나다. 족두리풀은 발치에 연한 진보라꽃을 암탉이 병아리 품듯 하고 서있다. 하얀 미나리냉이꽃이 무더기로 보인다. 영락없는 ‘미나리이파리에 냉이꽃잎’이다. 그렇다. 곰배령 아래는 늦봄을 지나 막 여름이 오고 있다.
사진작가 김아타가 설치한 ‘곰배령캔버스’ 안내표지판.
사진작가 김아타가 설치한 ‘곰배령캔버스’ 안내표지판.

사진작가 김아타(57)가 설치해 놓은 길섶의 거대한 하얀 캔버스가 의미심장하다. 곰배령의 바람과 냄새와 소리를 수년 동안 담겠다니! 과연 ‘곰배령이 붓질한’ 그림은 어떤 모습일까.

곰배령 중간마을 강선리(800m)에선 졸방제비꽃과 족두리풀꽃이 심심찮게 눈에 뜨인다. 아직 달아나는 봄 뒷덜미를 잡고 있다. 연령초꽃이 코끼리 귀만큼 너른 잎 위에서 앙증맞게 하얀 턱받이를 하고 있다. 그 옆에 노란 양지꽃이 다소곳하게 서있다.

곰배령은 퉁퉁한 아빠 곰이 배를 벌떡 뒤집고 누워있는 모습이다. 평평하고 완만하다. 이곳 사람들은 ‘구부러진 고무래(곰배)’나 ‘곰배팔’처럼 생겼다고도 한다. 봄여름 가을 널따란 둔덕에 850여 종의 온갖 들꽃이 피었다가 진다. 곰배령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점봉산(1424m) 능선이다. 점봉산은 오색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설악산과 마주보고 있다. 한반도 식물의 남북방 한계선이 맞닿는 곳이다. 금강초롱, 솔나리, 왜솜다리, 한계령풀, 모데미풀, 진부애기나리 등 보호식물이 30여 종에 이른다.

6월 곰배령은 노란 미나리아재비꽃이 지천일 것이다. 뿌리에서 쥐오줌 냄새가 난다는 연분홍 쥐오줌풀꽃도 우르르 피어난다. 전호(前胡) 하얀 꽃은 꽃잎을 우산살처럼 활짝 펼치며 으스댄다. 자줏빛 띤 갈색의 매발톱꽃이 드문드문 의뭉하게 꽃잎을 열 것이다. 그리하여 7, 8월이 되면 ‘반공중에 덩그러니 들꽃정원’을 매달아 놓을 것이다.

‘그대 한눈팔다 들어간 길/한참 되돌려 나올 때/그대의 숨은 눈빛 끌어내어/빛만 남기고 사라지던 꽃/마타리, 어수리, 궁궁이/그 뒤쪽 어딘가/자취 없이 흔들리던 꽃//그 꽃에 홀려 나는/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 (신대철의 ‘곰배령 넘어-무슨 꽃 1’에서)

■ Travel Info

교통

▽승용차=서울∼춘천∼동홍천나들목(국도 44호)∼인제∼현리∼진동리, 서울∼양평(국도 44호)∼홍천∼인제∼현리∼진동리(강원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218 점봉산생태관리센터·033-463-8166)

▽버스=동서울∼인제(2시간 20분 소요), 서울 상봉동∼인제(2시간 40분 소요), 현리에서 진동리 설피밭까지는 버스가 있지만 하루 2회에 불과. 택시로는 3만 원쯤 나온다. 동서울터미널∼현리 직행버스는 하루 4회 운행.

먹을거리

△강선마을곰배령끝집 산채정식(재래된장, 조선간장, 곰취, 명이, 두릅, 당귀 택배 가능·033-463-0046) △산골나들이산채비빔밥(010-2277-4643) △고향두부집(033-461-7391)

민박

진동계곡에는 산사람, 귀농인, 은퇴자, 화가, 환경운동가, 공동체 생활자, 시인, 소설가, 수행자, 병 치료자, 은둔자 등 온갖 사람들이 어젠가부터 한두 명씩 스며들어 살고 있다. 모두가 ‘독립특행(獨立特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각자가 ‘하나의 왕국이고 하나의 세계’이다. 도회지살이의 고단함, 번잡함 그리고 밥벌이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민박집 이름을 보면 대충 주인장의 철학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별꽃 만발한 밤하늘 아래 주인장과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대단한 인연이 될 것이다.

△설피밭지수네(033-463-0411, 010-4813-1051) △강선마을곰배령끝집(033-463-0046) △연가리맑은터(033-463-2161) △풍경소리(033-463-1209) △세쌍둥이네풀꽃세상(033-463-2321) △곰배령꽃별하얀펜션(033-463-4046) △꽃별하얀(010-8878-4242) △새나드리(033-463-7790)

곰배령 탐방 사전예약제


수, 목, 금, 토, 일요일에만 입산이 허용된다. 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 홈페이지(supannae.forest.go.kr·033-463-8166∼7)에서 매달 20일 오전 9시 그 다음 달 입산 허가 신청을 해야 한다. 따라서 6월 탐방객은 이미 이달 20일에 마감됐다.

6월에 곰배령을 오르려면 현재로선 진동리 민박집의 허가 신청을 통해 오르는 수밖에 없다. 진동리 주민과 산림청의 윈윈 전략이다. 탐방객은 하루 200명으로 제한된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입산허가증을 내준다. 봄가을 산불 예방기간(2월 1일∼5월 15일, 11월 1일∼12월 15일)엔 입산이 전면 금지된다. 탐방 가능 기간(12월 16일∼다음 해 1월 31일, 5월 16일∼10월 31일)에도 매주 월, 화요일엔 문을 닫는다.

▼ 강선마을 ‘작은 절집’ 서래굴 성일스님, 풀꽃나라 오실 땐 뒷주머니에 시집 한권 넣어 오세요 ▼

곰배령생태관리센터와 곰배령 사이엔 미니마을이 있다. 10가구가 사는 강선마을이 그곳이다. 생태관리센터에서 1.7km의 거리. 해발 800m의 오지마을이지만 자동차도 들어가고 휴대전화도 터진다. 민박집과 음식점도 2곳씩 있다. 곰배령을 오르내리는 탐방객들은 으레 강선마을 주막집에서 누런 옥수수막걸리를 한두 잔씩 들이켜곤 한다. 점봉산이 생태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에 화전민들이 가꾼 마을. 하지만 요즘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 외부에서 새로 정착한 사람들이다.

‘서래굴’이라는 조계종의 소박한 사찰이 이채롭다. 탐방객들은 대부분 모르고 스쳐 지나간다. 석가모니부처님만 모신 자그마한 절집. 주지는 20여 년 전부터 묵정밭에 조금씩 절집을 지은 성일 스님(58·사진)이다. 고향도 이곳에서 가까운 인제읍. 누가 알아주건 말건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매일 땅과 마음을 일구며 부처님 모시고 살 뿐이다.

“외롭지 않냐고요? 허허! 외로움이야말로 참으로 즐거운 것이지요. 고독만큼 귀한 게 어디 있어요? 남 시선에서 벗어난다는 거, 대단히 복 받은 겁니다. 깨달음? 잘 모르겠어요. 남을 이해한다는 거? 도대체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요?”

성일 스님의 손은 농부 손만큼이나 투박하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 그가 나서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주민들에게 절에 나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불자가 통틀어 다섯이나 될까. 그것보다는 ‘요즘 곰배령 탐방객들의 얼굴은 왜 그렇게 엄숙하고 굳어있을까’에 더 신경이 쓰인다. 군인들 행군하는 것처럼 스틱 짚어가며 잽싸게 오르내리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곰배령 길은 가슴으로 느끼고 꿈꾸는 곳입니다. 오전에 오를 때 등 뒤에서 붉은 해가 밀어주고, 오후에 내려올 때도 해가 등짝을 살며시 두드려 줍니다. 바지 뒷주머니에 미당이나 백석, 정지용 선생 시집 한 권 넣어 오세요. 스케치북 한 권 가지고 와서 온갖 풀꽃 한번 그려보세요. 가족끼리 웃음꽃 피우며 살갑게 이야기하며 걸어 보세요. 그래서 어수룩한 점봉산 곰배령을 닮아 집에 돌아가세요. 산잔등에 만발한 들꽃 닮아 돌아가세요.”

진동계곡 주변을 수놓은 하얀 야광나무.
진동계곡 주변을 수놓은 하얀 야광나무.
▼ ‘어수선한 저잣거리’로 바뀌는 진동계곡… 골짜기마다 펜션 넘쳐나고 공사소리 요란 ▼


진동계곡은 ‘깊고 푸른’ 골짜기였다. 인제 현리에서 진동리 설피밭까지 거리가 무려 27km에 이른다. 가도 가도 물소리 바람소리만 들렸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길가엔 군데군데 허름한 집들이 오종종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계곡 좌우에 ‘삐까번쩍’한 집들이 쉽게 눈에 띈다. 진동리 설피마을 같은 경우 2001년 30여 가구에서 요즘엔 120여 가구로 늘었을 정도다.

교통도 인근 현리보다 훨씬 좋아졌다. 조침령 터널을 통하면 승용차로 양양까지 30분이면 닿는다. 외통으로 막혔던 계곡이 툭 터져버린 셈이다. 양수발전소가 들어선 데 이어 최근엔 동홍천∼양양 도로 개설 공사로 진동계곡 일대가 온통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곳곳 산허리가 잘리고 레미콘공장에 공사현장사무소까지 들어섰다. 생태보전지역인 점봉산이 점점 외로운 섬이 돼가고 있다.

‘조선의 협객’ 백동수는 1773년 늙은 부모를 비롯한 가족을 이끌고 인제군 기린골(현 진동계곡)에 정착했다. 단칼에 구차한 ‘한양살이’를 접어버린 것이다. 백동수는 진동계곡에서 10년 동안 ‘송아지를 짊어지고 들어가 키워서 밭을 갈고, 소금 된장이 없는지라 산아가위와 돌배로 장을 담가 먹으며’ 살았다. 당시 백동수는 ‘그곳은 큰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문밖을 나서면 ‘열 손가락에 못이 박인 나무꾼과 봉두난발의 광부들만이 화롯불을 앞에 두고 빙 둘러앉아 있고, 밤이 되면 바람이 쏴아 불어 집을 스쳐 돌아가고, 슬픈 짐승들이 끊임없이 울부짖는 그런 곳’이었다.

백동수의 호는 ‘야뇌(野뇌)’다. 야뇌란 ‘황야의 굶주린 늑대’ 정도의 뜻이다. 백동수의 벗들은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당시 조선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가난뱅이였으며 한양 도성 주위에서 무위도식하며 맴돌고 있었다.

오늘날 진동계곡은 더이상 오지가 아니다. 백동수 같은 ‘늑대인간’도 찾아보기 힘들다. 민박집(펜션)만 ‘비 온 뒤 죽순 돋듯’ 하고 있다. 계곡물도 예전만큼 깨끗하지 않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점봉산과 곰배령이 갸륵하고 기특하다. 과연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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