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칼럼]그들은 내게 가슴벅찬 기쁨을 주었다

  • 입력 2002년 6월 19일 18시 40분


나는 어제 이탈리아전을 강남까지 가서 시청했다. 선제골을 내주었을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우리 쪽에서 골이 터졌을 때 또 얼마나 환호했는지 아직껏 어깨가 아프고 목이 얼얼하다. 아침에 깨어보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무슨 꿈을 꾼 것 같다.

나는 축구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축구뿐만이 아니다. 어떤 종목이든 스포츠에 대해서는 늘 할말이 없는 사람이다. 본래 게으른데다 패자가 있어야 승자가 있기 마련인 게임을 즐길 줄을 모르는 성격이라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럴 수도 있구나, 하며 쳐다보는 편이었다. 그러니 올초부터 본격적으로 월드컵얘기가 나올 때마다 무슨 시끄러운 일을 만난 사람처럼 이마가 찌푸려지기까지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프랑스와 평가전이 있기 전까지 나는 지단이나 호나우두라는 이름도 들은바가 없었고 오언이나 박지성이 누군지 전혀 사전 인지가 없었다. 내 인생에 축구경기를 전반후반 다 본 것이 한국과 폴란드전이 처음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한참 인도여행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이 인도에 사흘 머물다 온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삼 주일, 그 다음은 석달 순으로 한 삼년 쯤 지내다 온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월드컵이 개막되고 난 후에 내가 그짱이었다. 모르면 그저 얘기나 듣고 있으면 되련만 분위기에 떠밀려 (어찌나 축구 얘기들만 하던지 한마디도 안했다간 벙어리인줄 알겠기에) 오프사이드가 무어냐고 물어서 주위 사람들의 빈축을 사면서 어제에 이르렀다.

처음의 무관심과는 달리 나도 모르게 축구에 빠져들고 있을 때 우리팀은 포르투갈을 무찔렀다. 솔직히 나는 우리팀이 포르투갈을 꺽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기에는 피구는 질주하는 표범 같았고 파울레타는 물어뜯는 삵같았다. 그런 포르투갈을 꺾은건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어제 오후에 지인이 이탈리아전을 함께 보자고 제의했을 때 동의했던 것도 이번 월드컵에서 이번 경기가 마지막이리라고 생각해서였다. 광화문에 나가볼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한번 쯤 군중들 속에 섞여보는 경험을 하고 싶었던 것이 강북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걸어서 강남의 약속장소에 나갈 때의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탈리아를 꺾는 장면을 열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게 될 줄이야. 그때서야 이건 단순히 축구경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 그처럼 완벽하게 사람을 긴장시키고 흥분시키고 기쁨에 빠뜨릴 줄이야. 온갖 편견과 가난과 소외와 마음속에 쌓인 한이 분출되는 순간이었다. 거리에 나서니 사방에서 경적이 울렸다. 마음껏 소리지르고 거침없이 즐거워하는 젊은이들이 어찌 그리 이뻐 보이든지. 그래 너희들은 부디 윗세대와는 다른 길을 가라, 밝고 활기차게 미래를 개척해나가라, 그들의 어깨를 깊이 싸안아 주고 싶었다.

거리의 젊은이들 중 남녀의 비율이 반반은 되어 보이는 것도 어찌 그리 보기 좋던지. 흔히들 축구는 남성들의 스포츠라고 하는데 이번에 그 벽을 깬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거칠 것 없이 함빡 웃음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 여성들을 보며 편모슬하에서 성장한 선수들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은. 어디선가 그 어머니들도 거리에 쏟아져 나온 발랄한 젊은 여성들과는 또 다른 감격을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축구에 대해서 무지하지만 이런 감동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 선수들이 감사하다. 이제 지면 어떻고 이기면 어떠한가. 지금까지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부디 부상당하는 사람없이 남은 경기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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