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칼럼]광화문 연가(戀歌)

  • 입력 2002년 6월 11일 18시 28분


영화 ‘파이란’에서 우리 말을 못하는 중국 여인이 서툴게 내뱉은 우리 말에 화들짝 놀라 한동안 그녀처럼 낯설게 그 말을 입에 올려보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미국전 필승 응원차 거리로 나서면서 나는 뜬금없이 백석의 시집을 손에 쥐었다. 광화문으로 가는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내내 백석의 시를 읽었다. 빗줄기 굵어지는 광화문 대로를 낯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울울히 걸어가며 방금 읽은 시를 기억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 좋은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미국전 무승부 직후, 광화문 뒷골목. 비는 죽죽 내리고, 더러는 소주집에 앉아 아쉬움을 달래고, 더러는 호프집에 앉아 다음 포르투갈전을 분석하는데, 나는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밤길을 늦도록 헤매다녔다. 내가 모닥불에 모여 앉은 당신들을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축구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비에 젖어가는 몸을 서로 내보이며 두 시간을 함께 열광한 낯선 당신들을 사랑하는 탓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 여기다! 하고 달려갈 때 유독 혼자서 저기다!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사람, 시인은 재즈풍으로 말할 것이다. 당신이 축구를 아느냐? 그래, 우리가 언제 축구를 진정 알기나 했던가. 하물며 사랑이라니. 밤 긴 줄 모르고 인터넷에 중독되었던 당신, 인간의 발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신통치 않게 흘려버렸던 당신, 나는 그래도 주책없이 당신에게 고백하고 싶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이제라도 당신은 죽을 때까지 축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는 사실! 당신을, 이 나라를,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함정임소설가etrelajih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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