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이 만든 이름, 고갈비[김창일의 갯마을 탐구]〈40〉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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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비릿한 내음과 대학생들의 열기, 술잔 부딪치는 소리 가득하던 도심의 골목길. 주머니 사정 어렵던 청춘들의 우정과 낭만을 풀어놓던 장소가 부산 고갈비 골목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을 닫는 점포가 늘어났다. 생선 굽는 냄새와 자욱한 연기, 젊은이들 노랫가락이 흐르던 공간은 이제 적막한 골목길로 변했다. 필자는 20여 년 만에 고갈비 골목을 찾아 나섰다. 광복동 번화가에서 코너를 돌아들면 70, 8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2층 건물 두 채가 서 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필자는 골목을 쓸고 있는 주인장 박 씨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전성기 때는 12집이 고갈비 장사를 했어요. 그때는 일손이 부족해서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손님이 넘쳤죠. 초저녁이면 테이블은 빈자리가 없었어요. 밖에 고무대야를 뒤집어서 놔두면 손님들이 둘러앉아서 먹었는데 골목이 꽉 찼습니다”라며 박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고갈비’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묻자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전부터 대형선망어선이 잡은 고등어는 전부 부산으로 들어왔습니다. 허름한 밥집에서도 고등어 한 토막은 빠뜨리지 않고 내놓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고기 먹기 어렵던 시절, 기름진 고등어는 돈 없는 대학생들에게 최고의 안주였던 셈입니다. 그때 대학생들은 자기들만의 용어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했어요. 고등어를 언제부턴가 ‘갈비’라고 부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이순신 코냑(소주), 야쿠르트(막걸리), 못잊어(깍두기), 파인애플(물김치), 오리방석(물), 포도주(간장)가 되었죠.” 그 시절 대학생들이 만들어 낸 신조어는 고갈비 골목 공용어가 되었다고 한다. 신조어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고갈비 골목 문화를 공유했던 것이다. 손님이 없어 한산하자 고등어를 굽던 주인 아주머니가 합석했다. 맛있게 굽는 비법을 물었다.

“비법은 없어요. 비린내 나지 않게 잘 씻는 겁니다. 싱싱하니까 소금을 살짝 뿌려서 몇 시간 냉장 보관 했다가 사용합니다. 신선한 고등어는 다른 양념이 필요 없어요. 점고등어(망치고등어)는 맛이 없어요. 골목에 고등어 굽는 연기가 자욱하니,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서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왔지요. 하루에 300∼400마리씩 굽는 날이면 시어머니는 연탄불 앞에 꼼짝없이 10시간씩 서 있었어요.”

고갈비 점포를 20년 전에 물려받은 부부의 이야기는 길었다. 밤이 깊어갔지만 손님은 뜸했다. 한때 고갈비를 구워내던 연탄불과 젊음의 열기가 어우러지던 공간은 쇠락했고, 고갈비 골목 문화를 공유하던 청춘들은 머리 희끗한 연배가 되었다. 구석진 테이블에서 몇몇 노인이 청춘을 회상하고 있었다. 맘보, 고바우, 단골집, 청기와, 돌고래, 청코너, 홍코너, 갈박사라는 간판은 이제 그들의 기억에만 존재한다. 고갈비는 그리움이며, 낭만과 추억을 되새기는 음식인 듯 보였다.

고갈비 골목 문화는 과거가 되었으나 고갈비라는 이름은 흔적으로 남아서 그 시절의 공간을 증언하고 있다. 주인장 부부와 대화를 마치고 골목을 벗어나자 광복동의 화려한 불빛과 젊음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광복동#고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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