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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이승우의 프로방스를 걷다]영역이란 욕망에 갇혀 사는 인간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입력 2018-04-10 03:00업데이트 2018-04-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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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남복 기자 knb@donga.com
조폭 영화 같은 데서 가끔 듣게 되는 일본말 ‘나와바리’는 구역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자기 구역에 대한 집착을 조폭들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구역을 지키려는 욕망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익숙한 곳에서 느끼는 안정감과 관련 있어 보인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동물들의 영역 표시와 다툼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식물들도 영역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한다. 어떤 식물은 다른 식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화학물질을 분비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식물 군락지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주인이 수차례나 바뀌었다는 사실을 ‘식물의 살아남기’(이성규)라는 책은 알려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 안에 이런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을 보면, 일종의 생존본능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향수나 애국심 같은 것의 심리적 기원이 이것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은 이런 생존본능의 발전된 형태, 그러니까 자기 영역을 넓히려는 욕망과 관계된 것으로 추측할 만하다. 탐험이나 정복의 성격을 지닌 여행은, 은밀히 숨겼든 노골적으로 드러냈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던 사냥이 취미가 된 것과 같은 변화가 이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여행에 유희적 성격과 함께 다른 의미가 추가됐다. 여행을 통해 울타리들은 낮춰진다. 울타리를 낮추는 것이 영역을 넓히는 방법이 된다. 전에는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높여야 했지만 지금은 울타리를 낮춤으로써 자기 영역을 넓힌다. 통신 수단의 혁명적인 발달로 인한 데이터와 정보의 제한 없는 유통이 물리적 국경의 구속력을 약화시키고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접촉 없이 접속만으로 사적, 공적인 모든 관계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역 표시의 완고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첨단 과학문명의 시대에도 어디선가는 농사를 짓고, 원자폭탄의 위협이 초미의 관심사인 세상이지만 재래식 무기로 전쟁을 하는 현장이 있듯이, 재래식 종교, 재래식 문화, 재래식 인종의 견고한 국경은 어딘가에 여전히 잔존한다. 대부분의 경우 여행자는 낮아진 울타리를 통해 자기 영역이 확장된 것을 보고 만족한다. 여행자는 표면만 보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보는 것은 사실은, 특히 짧은 여행인 경우 더욱, 보여주는 사람들이 보여주려고 한 것들이다. 여행자는 보여주는 사람들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만 보고 지나간다. 그래서 거기 있는 울타리를 보지 못한다. 굳이 볼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 정착해 살려고 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뿐 아니라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봐야 한다. 아니, 그들은 그런 것들을 더 많이 본다. 나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터키나 알제리 같은 곳에서 이주해온, 내 눈에는 외모상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이곳의 학생들로부터 지나가는 여행자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무시와 차별에 대해 들었다. 1년간 살 집을 얻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어떤 한국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아마도 일부 극단적인 무장 무슬림의 테러가 확산시킨 불안과 공포로 인해 더 강화됐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견고한 울타리에 대한 소문을 톨레랑스로 잘 알려진 나라 프랑스에서 듣게 되어 아프고 슬펐다.

그러면서 문득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무덤으로 쓸 땅을 사는 창세기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원주민인 헷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의 아내를 묻으려고 하는데, 무덤으로 쓸 땅을 여러분에게서 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란 출신의 아브라함은 아무리 낮춰 잡아도 40년 이상 이 땅에서 살았다. 40년은 한 세대가 넘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브라함은 자기를 나그네, 떠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많은 양과 염소들을 키우고 하인들을 여럿 거느린 부자가 되었지만 그때도 아내를 묻을 땅 한 평도 갖지 못한 떠돌이였다는 사실은 인간의 내부에 도사린 뿌리 깊은 ‘나와바리’의 구속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일본의 재일동포들과 미국의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이 그 나라에서 산 세월, 그럼에도 여전히 받고 있는 차별을 떠올리게 한다.

종교와 교육, 문화의 꾸준한 세례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짐승 이상이기는 어렵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 종교와 교육과 문화, 그 인간적인 것들이 인간을 더 짐승 이상이 되지 못하게 한다. 사라진 옛 인류의 게놈을 해독하여 인간의 유전적 차이를 밝히는 연구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뉴스를 최근에 보았다. 이런 연구들이 울타리를 높이고 구역 간의 싸움을 부추기는 구실로 사용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인간이 그만큼 편협하고 완고한 동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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