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도 과일 몇 개, 포, 전만 간단히 드시는데…”[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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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 17대 종손 이치억 씨

퇴계의 17대 종손인 이치억 씨는 3일 인터뷰에서 “예란 언어 같아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면 사라지게 된다”며 “미풍양속인 제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제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그가 일하는 지역에 있는 충남 논산 명재(明齋) 윤증 고택에서 진행됐다. 뒤쪽에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명재 윤증 집안의 사당이다. 논산=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퇴계의 17대 종손인 이치억 씨는 3일 인터뷰에서 “예란 언어 같아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면 사라지게 된다”며 “미풍양속인 제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제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그가 일하는 지역에 있는 충남 논산 명재(明齋) 윤증 고택에서 진행됐다. 뒤쪽에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명재 윤증 집안의 사당이다. 논산=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이진구 논설위원
이진구 논설위원
《올 설을 앞두고 한 여대생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명절 폐지를 간청합니다’란 글을 올렸다. 어머니가 30여 년간 수십 명 친인척의 명절 뒤치다꺼리를 혼자 도맡다 보니 너무 힘들어 이혼하고 싶어 할 정도라는 것이다. 명절 스트레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담을 주는 차례상은 어디서 나온 걸까. 퇴계의 17대 종손인 이치억 씨(43·백제충청유교특성화추진단 선임연구원)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紅東白西 棗栗梨시)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며 “저희 집안도 과일 몇 개, 전, 포 정도만 놓고 차례를 지낸다”고 말했다. 》

―퇴계 선생 댁 차례상은 어떻습니까.

“과일 몇 가지, 포, 전 정도만 올리지요. 설에는 떡국이 올라가고요. 그런데 저희 집에서는 추석 때 차례를 지내지 않고 10월에 시제(時祭)를 지냅니다.” (추석 연휴 때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요?) “원래 아주 옛날에는 돌아가신 날 각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요. 계절의 변화에 맞춰 지내는 사시제(四時祭)가 더 중요했고, 그때 함께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 거죠. 그래서 저희 집안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시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중양절이 연휴가 아니다 보니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모여 하는 거죠. 일부 잘못 알려져서 퇴계 선생 집안이 추석 차례 자체를 안 하는 걸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차례를 추석 연휴 기간이 아니라 10월에 한다는 뜻입니다.” (연휴 때는 뭘 합니까.) “명절이 아닌 그냥 연휴로 보내지요. 이번 추석 연휴에도 고향에는 내려가지만 손님 오면 인사드리는 정도지 별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뼈대 있는 집안인데 상차림이 너무 간소한 것 아닙니까.

“명절 차례상은 물론이고, 제사상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지는 않습니다. 주자가례에도 제사상에 어떤 과일을 어느 자리에 놔야 한다고 하나하나 지정돼 있지는 않습니다. 가장 앞줄에 과일, 그 뒤는 채소, 그 뒤는 고기 등 반찬, 그 뒤는 식사… 이 정도만 쓰여 있죠. 작년 10월 시제 때는 통닭도 올렸는데요?” (통닭요?) “원래 영남지역에서는 생고기를 쓰는데 그러면 못 먹으니까 익힌 닭고기를 올렸지요.”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늘 홍동백서를 말씀하셨는데요.) “사실 그 말이 어디서 유래됐는지는 알 수 없어요. 애초에는 간소하고 형식도 없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더 정성을 들이려는 마음과 과시 등이 더해져 과해진 게 아닌가 합니다. 퇴계는 항상 간소한 옛날 예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상에 유밀과를 쓰지 말라고 유훈을 남기셨지요.”

※유밀과(油蜜果)는 밀가루에 기름과 꿀을 섞어 반죽한 것을 기름에 지져 꿀에 담갔다 먹는 과자. 제사상에 과일 대신 올렸는데 퇴계가 유밀과 사용을 금지한 것은 비싸기도 했지만 후대에 제사가 과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지난해 10월 시제 때 퇴계 선생에게 올린 차례상.
지난해 10월 시제 때 퇴계 선생에게 올린 차례상.
―중간에 상차림이 바뀌기도 했나요.

“저희 집안은 원래 제사상 가장 왼쪽에 대구포를 놨어요. 그런데 퇴계 선생의 손부 때부터 가운데로 바뀌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읜 손부가 혼자 제사를 지내다 보니 술을 따라 올릴 때마다 자꾸 치마에 대구포가 걸려 쓰러졌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중앙에 놓았는데 그게 계속 이어졌다고 합니다.”

―차례, 제사를 간소화하자는 목소리가 많은데, 종손집은 어떻습니까.

“종손 모임에도 1, 2부 리그가 있는데, 2부 리그 모임에 가보면 생각이 정말 많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죠.” (1, 2부 리그라니요?) “저희 집안에서 종손은 저희 아버지 한 분이고, 저는 아직 종손이 아니에요. 종손이 될 차종손(次宗孫)이죠. 각 집안 종손들의 모임을 우스개로 1부 리그, 저처럼 차종손들의 모임을 2부 리그라고 부르죠. 근데 정말 윗세대와는 많이 달라요. 사실 변하지 않으면 계속 유지할 수도 없고요. 저희 집도 과거에 비하면 절반 정도 줄어서 10여 번만 지냅니다.”

※종손(宗孫)은 불천위를 모신 집안의 봉사손을 말한다. 불천위가 없는 집안의 봉사손은 주손(胄孫 또는 主孫)이다. 불천위(不遷位)는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영구히 제사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로 여기서는 퇴계의 신위다. 종손이 사망하면 길사(吉祀)를 지내고 차종손이 종손을 이어받는다.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아버님이 무척 열린 분이신데, 할아버지께 강하게 말씀드려 줄였지요. 제사 문제는 집안마다 특징이 있어 쉽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사가 현대사회에 맞게 바뀌지 않는다면 결국 없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지요.” (제사가 없어질 거라고요?) “옛날 형식 그대로 유지하면 누가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간에 갈등이 계속될 테고, 그러다 보면 힘드니까 아예 ‘이럴 바엔 지내지 말자’ 하겠지요. 부모님이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특별하게 지내고 싶은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제사란 그렇게 시작된 것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형화된 틀을 만들고 형식이 마음보다 위에 있게 된 거지요. 저는 제사는 미풍양속이고 그래서 계속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제사가 변해야 합니다. 예(禮)란 언어와 같아서 사람들과 소통하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라지고 말죠.”

―10여 번도 적은 수는 아닙니다만….

“퇴계 선생을 기리는 불천위 제사와 종손의 4대조까지 내외분 기일, 설과 추석 차례 등입니다.” (여성들의 명절 스트레스는 없습니까.) “없지는 않지만, 서로 나누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어르신들은 앉아 계시지만 저를 비롯해 다른 남자들은 음식도 나르고, 설거지도 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일을 해요. 여자들에게만 맡겨놓고 놀지 않습니다. 불천위 제사가 아닌 가족끼리 지내는 기제사에는 남녀가 다 제사상 앞에서 절도 하고요. 음식 만드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일을 남녀가 같이 합니다.” (여성들도 절을 한다고요?) “네, 원래 예법이 그래요. 첫 잔은 종손이 올리고, 두 번째 잔은 종부가 올리지요. 단지 불천위 제사에는 손님이 너무 많이 오니까 준비할 게 많아 함께 못 하는 것뿐이지요. 남자들도 손 좀 까딱해야 해요.”

※퇴계의 불천위 제사는 퇴계와 부인 2명 등 세 번이었으나 올해부터 음력 12월 8일 퇴계 기일에 맞춰 함께 지내기로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도 매년 8월 15일 광복절에 4대의 기일 제사를 함께 지내고 있다.

―작년 추석엔 일부 벌초를 대행업체에 맡겼다던데….

“산소가 퇴계 선생부터 한 30여 기 되다 보니… 벌초 없이 성묘만 다녀도 닷새가 걸리거든요. 다 돌아보는 게 원칙이기는 하지만 너무 많아서 후손들이 나눠서 살피기도 합니다.”

―실례 같습니다만, 그냥 장남도 결혼하기 힘든데 17대 종손이라 지장은 없었습니까.

“하하하, 그런 걸 묻는 기자들은 없었는데… 짚신도 짝은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사귄 것도 아니었고요. 지금의 아내와 만난 뒤 종손이라고는 했는데… 아마 그전부터 주변에서 말해줘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 같은 문제가 없는 집보다야 신경 쓸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있겠지만 결혼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처가에서 반대를 안 하던가요.) “처가의 큰집도 지역에서 기와집에 사는 유지 집안이라 아내도 그런 문화에 좀 익숙한 것 같더라고요. 좀 힘들긴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결혼을 안 하지는 않겠다는 사람이니까요.”

―어릴 때는 좀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고교 졸업 때까지 안동 종택에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의관을 갖추고 사당에 참배한 후 식사를 하셨지요. 문안 인사 드리듯이… 외출도 사당에 제를 올린 후 하셨고요. 아버지도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 걸 지키는 게 힘들었나요.) “하하하. 그것보다는… ‘너는 다른 사람하고 다르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압박 때문에 좀 숨이 막혔죠. 유교문화가 종손에게 주는 무게라고 할까…. 그래서 고교 시절까지는 유교를 싫어했고, 유교는 정말 없어져야 하는 거라고 생각까지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래서 탈출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일본 대학으로 진학해 동아시아 지역문화를 전공했는데 그때 논어 장자를 배우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요.”

―퇴계 종손이어서 갖는 전통이 또 있습니까.

“글쎄요… 돌림이 아닌 글자에 마음 심(心)자를 꼭 넣는 게 전통이라면 전통이지요. 그래서 제 이름 치억(致億)과 제 아들 이름 이석(怡錫)에 ‘심’자가 들어 있고요. 퇴계 선생의 학문을 심학(心學)이라고 하잖아요. 그 의미를 기리자는 뜻에서 종손이 될 맏아들 이름에 꼭 넣고 있습니다.” (아들이 있다고요?) “네, 둘 있는데 큰애는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죠. 퇴계 이황의 18대 종손이 될 놈이죠. 하하하.” (아… 괜찮겠습니까.) “하하하.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종손인 게) 좋은 점이 더 많은 세상이 올 수도 있고요.”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추석#명절#차례상#제사상#퇴계 이황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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