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우 칼럼]관제 민족주의 광풍의 끝은 어디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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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日 정서 자극 관제 민족주의, 외교·안보 정책 정신분열 초래
사법자제 원칙 깬 강제징용 판결, 정부 침묵은 무책임한 일
軍도 반일 충성경쟁 시류 편승… 평화·안보 공조가 우선해야

천영우 객원논설위원·(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천영우 객원논설위원·(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밑도 끝도 없는 역사전쟁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좌우 이념갈등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도 건국을 둘러싼 역사인식의 대립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100주년 기념사를 통해 보수세력을 친일 잔재와 연결하고 이를 적폐청산의 프레임에 끌어들이면서 역사전쟁의 판은 더 커졌다.

좌파의 주관적 역사관으로 대중을 의식화하는 것은 국민들의 영혼을 장악하기 위한 문화혁명 차원에서는 기발한 발상으로 보인다. 반일정서를 최대한 자극하여 일본을 악마화하는 동시에 독립투사들을 ‘빨갱이’로 몰았다는 일제의 앞잡이들을 보수세력의 뿌리로 국민 의식 속에 깊이 각인시키는 데만 성공하면 좌파의 정치적 기반은 확고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공정(工程)을 통한 정치지형 재편 시도는 우리 사회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고 정치문화를 퇴보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외교·안보 정책에서도 정신분열 증세의 원인이 되고 세계화 시대에 추구해야 할 가치와도 충돌한다. 정부가 역사인식 문제에 직접 뛰어들어 결판을 내려는 시도에 대해 진보진영의 원로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관제민족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지적하고 “역사 이해와 교육은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가했다.

좌파의 반일 민족주의는 주자 성리학에 함몰되었던 조선 사대부들의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과 정신적으로 맥이 닿아 있다. 화이(華夷)질서의 잣대로 세계를 문명과 야만으로 구분한 위정척사파에게 일본은 야만의 표상일 뿐이었으므로 서양 오랑캐의 흉내를 내는 일본을 본받아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꾀하겠다는 발상은 조선의 정체성과 혼을 파는 것이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21세기 좌파 민족주의자들도 친일과 반일을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친일을 악의 대명사로 만들어가고 있다. 항일투쟁을 국가 정통성의 토대로 삼아 식민 잔재와 보수를 한통속으로 묶어 이를 일거에 청산하는 것이 정의가 불의를 이기고 역사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신념은 원리주의적 위정척사 사상을 연상시킨다. 위정척사 사상과 차이가 있다면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민족의 개념이 중화사상을 대체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친일 잔재 청산이 좌파가 명운을 걸고 매달려야 할 만큼 절박한 시대적 과업이고 반일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할 만한 절대선이고 가치인가. 반일 민족주의의 과잉은 공직사회에서도 국격과 국익을 지키는 것보다 친일의 낙인을 피하고 반일 선명성을 입증하는 데 급급한 풍조를 확산시키고 있다.

사법부조차 일본과 관련된 소송에서는 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국가 간의 외교적 사안에 대해서는 사법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문명국에서 통용되는 사법자제의 원칙임에도 작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강제징용 판결은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고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체결 이후 역대 정부가 일관되게 견지해온 조약 해석을 뒤집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국제적 신뢰성은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반일정서를 의식하지 않고 냉철한 법리만으로 내린 판결이라면 한일 기본조약에서 합의한 절차에 따라 당당하게 국제중재재판에 못 갈 이유가 없다. 정부가 53년간 고수해온 입장을 대법원 판결 이후 부정도 확인도 않은 채 한일관계의 파탄을 마냥 방치하는 것도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최근에는 군(軍)까지 항일투사의 대열에 합세했다. 욱일기를 게양한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일본의 기습공격을 당한 진주만이나 일본과의 전쟁에서 1000만 명 이상의 인명을 잃은 중국의 항구에는 입항할 수 있어도 우리 항구엔 입항을 거부당하고 있다. 한국 방어만을 위해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일본을 굳이 이렇게 대해야 직성이 풀리나.

일본 초계기에 대한 우리 해군 구축함의 사격통제 레이더 작동 여부를 둘러싼 논란도 그 잘잘못을 떠나 처리 방식에서 국가안보에 대한 고심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역내 평화와 안보에 대한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 간의 소통과 공조가 어느 때보다 긴요한 시기에 반일 충성경쟁에 군까지 꼭 나서야 하나. 도대체 관제민족주의 광풍에 대한민국이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하는가.
 
천영우 객원논설위원·(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역사인식#3·1절 100주년 기념사#친일#적폐청산#반일정서#한일 기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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