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해 국제부장의 글로벌 이슈&]옥스퍼드대 엘리트들 ‘배신 정치’의 종말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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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를 주도한 쌍두마차인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왼쪽)과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오른쪽)은 영국 보수당 반역의 역사에 기록을 남기게 됐다. 총리 출마를 전격 선언한 고브는 존슨을 이용만 해 먹고 토사구팽한 배신의 정치인으로 불린다.
브렉시트를 주도한 쌍두마차인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왼쪽)과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오른쪽)은 영국 보수당 반역의 역사에 기록을 남기게 됐다. 총리 출마를 전격 선언한 고브는 존슨을 이용만 해 먹고 토사구팽한 배신의 정치인으로 불린다.


최영해 국제부장
최영해 국제부장
6월의 마지막 날인 30일 오전 9시 53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이끌어 차기 총리 후보를 눈앞에 둔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52)의 유세단장을 맡은 린턴 크로스비는 느닷없는 전화 한 통을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불과 2시간 뒤면 존슨의 총리 출마 선언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었다. 마이클 고브(49)는 데이비드 캐머런(50) 보수당 정부의 법무장관으로 존슨을 도와 브렉시트를 만들어 냈다. 고브는 “나는 총리 권력에 의지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온 사람이다. 영국 언론은 “고브가 달리는 존슨의 등에 창을 내리꽂았다”고 보도했다. 고브는 존슨에게 전화하지 않고 5분 뒤 바로 총리 출마 선언을 해 버렸다.

“존슨을 도우려 했지만 리더십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고브의 출마 선언을 “뻐꾸기 둥지 음모(cuckoo nest plot)”라고 했다. 뒤통수친 고브의 배신을 ‘뻐꾸기가 다른 새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 새끼치기를 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존슨이 기자회견을 하는 세인트어민 호텔에는 하원 의원이 90명 모이기로 했으나 달랑 25명만 모였다. 고브가 전날 밤 존슨 지지파 수십 명을 구워삶았던 것이다. 연단에 선 존슨은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브루투스의 말을 인용했다.

“지금은 역사의 흐름에 싸울 때가 아니라 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운명을 항해할 때입니다.” 폭탄선언은 뒤에 있었다. “동료들과 논의한 결과 내가 총리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영문도 모른 의원들의 눈이 동그래졌고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흐느끼는 의원도 있었다. 존슨은 질문도 받지 않고 호텔 비상구로 빠져나가 버렸다.

브렉시트 권력을 장악한 존슨의 세상은 이처럼 ‘6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영국 언론은 유명한 레닌의 말을 인용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건 수십 년이지만 수십 년 동안 벌어질 일이 불과 수주 안에 일어난다.” 이번엔 수주도 아니고 불과 몇 시간 동안 벌어진,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였다.

영국 보수당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믿었던 동료의 칼에 찔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브렉시트 권력을 놓고 벌어진 배신의 드라마 주인공인 캐머런, 존슨, 고브는 영국의 최고 명문 옥스퍼드대 동문이다. 캐머런 총리 밑에서 법무장관을 맡은 고브는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식사할 정도로 캐머런과 막역한 사이다. 하지만 브렉시트가 두 사람 사이를 쫙 갈라놨다. 고브는 캐머런에게 등 돌리면서 존슨과 손잡고 브렉시트를 선동했다. 존슨과 고브, 둘 다 사회 초년병을 기자로 출발해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지내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런던 시장을 8년 동안 연임한 존슨은 캠페인 때 거침없는 발언으로 ‘영국판 트럼프’로 불렸다. 사탕발림 언변은 세계화로 고통받는 저소득층 노동자와 이민자를 싫어하는 노년층의 표를 제대로 긁어모았다. 브렉시트의 일등공신 존슨의 실체는 국민투표 이후에야 드러났다. 국민이 공약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술렁이자 지난달 27일 존슨은 텔레그래프에 기고문을 냈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염장지르는 소리였다. “EU 탈퇴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비정상적이고 불투명한 EU의 법체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일 뿐”이라며 일자리, 경제 활동, 여행에서 변화가 없다고 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보수당에서는 “보리스 빼고는 다 괜찮다(Anything but Boris)”라는 말이 나왔다. EU 잔류를 희망한 토리당 의원들에게 존슨은 공공의 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칼럼은 존슨 명의였지만 검토와 수정을 고브가 맡았다. 그것도 존슨의 최종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배신과 반역의 드라마엔 으레 여자가 등장하는 법이다. 약삭빠른 고브의 뒤엔 데일리메일 칼럼니스트인 그의 부인 세라 바인이 있었다. 바인은 남편에게 보낸 e메일에서 “확실한 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면 존슨을 지지하지 말라.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과 데일리메일 편집인 폴 데이커는 존슨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라는 내용을 썼다. 이 메일이 엉뚱하게 다른 사람에게 보내졌고, 한 신문의 1면과 2면 톱을 장식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인가, 바인이 일부러 흘렸다는 의혹이 퍼졌다. 칼을 맞은 존슨 입에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하다.

최고 엘리트 옥스퍼드대 동문 3인방을 둘러싼 배신과 음모의 정치, 그 종착역은 어디일까. 잃을 게 많아 너무나 두렵고 배부른 보수들의 치사하고 지저분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고든 레이너 텔레그래프 수석 기자는 “정치는 정말 더러운 비즈니스다”라고 썼다. 배신과 음모가 활개 치는 정치판은 어디서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최영해 국제부장 yhchoi65@donga.com
#브렉시트#영국 엘리트#배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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