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1946년, 반탁과 찬탁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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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신탁통치 반대 시위
1946년 신탁통치 반대 시위
1946년 1월 14일. 경복궁 앞 광장에 태극기가 올라갔다. 일장기가 내려간 옛 조선총독부의 30m 높이 두 깃대 중 하나에는 미 군정청의 성조기가 걸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었다. 광복 이후 만 5개월 만의 국기 게양식이었다. “국권과 국토를 빼앗긴 이 겨레에 새 희망과 해방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신문은 표현했다(동아일보 1946년 1월 15일자).

평양 주둔 소련군사령부 대표단 70여 명이 서울행 기차로 내려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한반도의 독립 문제를 협의할 미소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을 위해서였다. 서울을 비롯해 38선 이남은 새해 들어 2주 내내 난리였다. 연말에 전해진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의안에 여론은 찬반 양쪽으로 갈려 대립하고 있었다. 연일 성명이고 시위였다. 테러도 일어났다.

김구는 새해 첫날 라디오 방송을 통해 “평화적 수단으로 신탁통치를 배격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일사불란 신탁 찬성을 표방한 38선 이북에서는 조만식이 소련군사령부의 신탁 지지 요구를 거절하고 감금되었다. 이승만은 공산분자와의 협상은 무의미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메시지를 소련 대표의 서울 도착 날 발표했다.

“신탁 반대”와 “신탁 찬성”의 함성으로 가득 찬 광복 후 첫 새해. 나라살림은 빈궁 그 자체였다. 물가고와 식량난이 엄습했다. 새해 들어 전기료가 두 배로 인상되었고, 물자 부족으로 쌀과 석탄은 배급제로 돌아섰다. 반탁 찬탁(反託 贊託) 데모 사이에 쌀을 달라는 군중시위가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졌다. 소련 대표들이 도착한 1월 15일, 서울시청과 미 군정청은 120만 서울시민의 식량 해결책으로 배급 실시를 발표하면서 쌀이 이처럼 시중에 풀리지 않는 데에는 생산자와 유통자들의 농간도 있다고 ‘애국심 없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다음 날 미국과 소련의 예비회담이 태극기가 새로 휘날리는 군정청에서 개막되었다. 신문에는 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듯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렸다.

‘삼천만이 합심(合心)하면 태극기 한 폭에 마음이 엉키고/삼천만이 각심(各心)되면 태극기 한 폭이 삼천만 갈래라/…/너는 퇴보! 나는 진보!를 가릴 것 없이 태극기 밑 한 목적지로 모이자.’(1월 16일자)

회의 기간 동안 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가두시위가 경복궁 앞 군정청 주위에 집중되었다. 그렇게 반탁과 찬탁의 소용돌이 속에 맞은 광복 후 첫 3·1절은 좌우익이 파고다공원과 남산공원에서 따로 27주년 기념식을 치렀다. 3월 20일 개막한 미소공동위원회 본회담은 두어 달간 표류하다 흐지부지되었다.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고 분열의 앙금은 짙어졌다. 남북은 점점 분리되어 38도선은 국경 아닌 국경선처럼 되어갔고, 그 남쪽은 좌우라는 추상어를 경계선으로 쪼개져 갔다.

미소공위가 공전하던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북쪽을 다녀온 미국의 방북시찰단은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북녘 땅은 오로지 공산주의와 소련 점령정책만이 지배하고, 그러한 지배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용인되는 지역이다. 남쪽에서 그토록 요란스럽고 시끄러웠던 가지각색의 구호와 선전문은 38선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완전히 그 소리와 자취를 감춰버리고 오직 몇 개의 구호만이 남는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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