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이게 정말 나라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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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 좌·우파 문제 아니다… 인간 수준 문제를 진영논리 호도
진영 틀 속 도덕적·법적 판단 마비… 지역감정, 우파정권이 키웠다면
진영감정은 좌파정권이 조장… 수치 모르는 조국들 넘쳐나는 나라

박제균 논설주간
박제균 논설주간
조국 사태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높이, 즉 수준의 문제다. 사람이면 마땅히 갖춰야 할 격(格)의 수준 말이다. 인격이나 인품,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한데 이걸 자꾸 좌우의 문제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수준의 문제를 좌파·우파의 진영논리로 호도하려는 사특한 기도다. 그런데 그게 먹힌다. 대한민국의 기막힌 현실이다.

좌우 진영논리는 어느새 이 나라에서 만능열쇠가 돼버렸다. 자신이 쏟아놓은 말·글과 살아온 행적이 들어맞는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 그래서 연극성 인격장애가 아닌가 의심스러운 사람도 진영의 틀에 넣어 돌리면 면죄부를 받는다. 심지어 실정법을 어겨도 진영의 틀 안에서 정신적 무죄를 받는다. 그래서 누구보다 떳떳하다. 정상적인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한때는 지역감정이 우리 사회의 망국병(亡國病)으로 불렸다. 지역감정이란 게 어느 시대나 상존했고, 지금도 맹위를 떨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호남 출신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꼭짓점으로 지역색에 덜 민감한 유권자 세대가 속속 유입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은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이후 지역감정보다 더 위험한 감정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좌·우파가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상대를 향해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하는 진영감정이다.

과거 지역감정을 보수우파 정권이 키운 측면이 있다면 진영감정은 진보좌파 정권이 조장한 면이 크다. 그 결과 문재인 정권 들어서는 대한민국이 두 동강으로 갈라진 느낌마저 준다. 대통령 자신부터 국민통합보다는 주류세력을 내 편으로 교체하는 데 앞장서 온 탓이다.

진영감정이 지역감정보다 치명적인 이유는 영호남이라는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온 나라가 휩쓸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이나 사건을 진영의 틀로 재단하는 순간 도덕적인, 심지어 법적인 판단마저 마비된다. 조국 정국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이 나라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많은 조국들이 넘쳐난다. 진실을 덮으려 사실상 회유·협박 전화를 해놓고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갖다 대도, ‘살아 있는 권력에 엄정하라’고 해놓고는 정작 산 권력에 검찰이 손을 대자 불과 한 달여 만에 ‘미쳐 날뛰는 늑대’라고 말을 뒤집어도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 언론의 본령인 비판, 특히 산 권력 비판은커녕 결사옹위에 나서는, 언론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의사(擬似) 언론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뒤에 숨어서 실검을 조작하고, 조국에게 따끔한 말을 했다고 문자 폭탄을 배설하는 익명의 무리들…. 모두가 진영논리라는 철갑 속에서 안전하고 떳떳하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독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4·19혁명과 6월항쟁을 일구며 자유로운 나라를 꿈꿨던 국민들은 익명의 갑옷 뒤에 숨은 군중의 독재를 두려워하는 처지가 됐다. 이게 바로 문 대통령이 말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인가.

문 대통령은 나라가 갈기갈기 찢기고 도덕적 법적 기준마저 좌우 진영논리에 함몰된 작금의 혼돈에 책임을 져야 한다. 본인이 갈등의 직접 원인제공자는 아닐지언정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 국민통합 의무를 방기하고 분열을 방조, 또는 조장한 책임이다. 책임지는 첫걸음은 당연히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다.

청와대와 여당, 정권 지지 세력들은 조 후보를 지명 철회하면 마치 정권이 결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어떤 나라도, 정권도, 대통령도 사람 하나 자른다고 무너지지 않는다. 조국은 대체 가능한 인물의 하나일 뿐이다.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한다면 기어코 민심을 이겨보겠다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에는 설설 기고, 미국과 일본에는 외교전에서 번번이 깨지면서 내부의 비판여론만 눌러버리겠다면 승복할 사람이 없다. 문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도 이 나라 국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 떠들어라, 난 내 갈 길 간다’ 식이어선 국정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음을 지난 2년 4개월이 증명한다.

그해 겨울 촛불을 든 많은 사람들의 비원(悲願)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라답지 않은 나라’를 만들어놓고 ‘이게 나라다’라고 한다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의문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나라인가.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조국 사태#조국 혐의#지역감정#조국 임명 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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