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형의 기웃기웃]느린 것과 늦는 것은, 다르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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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느린 사람이다. 밥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감정도 느린 사람. 하지만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 외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내 두 번째 책 제목을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로 정했을 때, 꽤 여러 사람이 내게 말했다. “너, 안 느리잖아?” 그건 사실, 나는 내가 느리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늦지 않으려 애를 썼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늦음으로 인해, 남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느린 것과 늦는 것은, 다르니까.

나는 늦는 사람들이 싫었다. 걷는 것도, 길을 찾는 것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도 느린 나는, 늘 일찍 출발하려 애썼다. 그러니 “차가 너무 막혀서”. 쉽게 늦고 쉽게 변명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일을 할 때도 늦는 사람들이 싫었다.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요즘 너무 바빠서.” 제 시간에 최선의 성과를 낼 자신이 없었다면, 그 일을 맡지 말았어야지. 남들보다 느리기에 늘 늦지 않으려 애쓰는 나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늦는 사람들을 싫어했던 것.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일 중 하나가 ‘늦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너는 왜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 그렇게 떠나보낸 사람이 있었다. 내 감정을 깨닫는 것조차 나는 참 느려서,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됐던 것 같다. 아, 내가 그 사람을 정말 많이 좋아했었구나. 그 사람은 알고 있었는데, 나는 몰랐던 내 감정. 그제야 나는 미안해졌다. 느린 만큼 내 마음 또한 더 많이 들여다보고 살펴봤어야 했는데, 참 미안했다. 그 사람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일 중 하나는 또한,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니까. 남들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 끼치는 폐 또한 생각했어야 하는 거다. 내가 늦어, 내가 놓쳐버린 것. 그런데 그건, 사랑만도 아니었다.

꽤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내 글씨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문체. 분명 내가 쓴 글이었다. 학창시절, 거의 20년 전 내가 썼던 이야기. 한참을 웅크려 앉아 읽어 내려갔다.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날까. 분명 내가 쓴 글이지만, 실은 내가 쓴 글이 아닌 듯. 완전한 타인의 글을 읽는 듯 페이지를 넘겨갔다. 그러다 마주하게 된 하얀 공백의 페이지. 나는, 화가 났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도대체 왜 20년 전의 내가 거기서 멈췄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는 끝낼 수도 없는 이야기. 그 다음이 아무리 궁금해도, 지금의 나는 그 이야기를 끝낼 수 없었다. 그건 이미, 내 글이 아니었으니까.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이미, 완전한 타인이 되어 있었으니까. 너무, 늦어버려서. 이제는 너무 늦어 영원한 미완성작으로 남아버린 이야기.

미안해졌다, 나 자신에게. 나는 그렇게 얼마나 많은 내 안의 이야기들을 잃어버렸을까. 나는 그렇게 얼마나 많은 내 안의 꿈 또한 잃어버렸을까. 나는 참 느린 사람이다. 하지만 늦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느린 것과 늦는 것은 다르니까.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일 중 하나는 늦는 것이니까. 그것도 나 자신에게 늦는 것. 그렇게 내 안의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니까.

강세형 에세이스트
#느린 것#늦는 것#사랑#이야기#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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