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평화의 도시? 예루살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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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안 올드시티의 동편으로 황금빛의 바위돔(Dome of Rock)이 있는 저 템플마운트(성전산)는 세 종교의 성지다. 이슬람에선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 유대교에선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었던 종교의 중심 그리고 기독교에선 예수가 여기서 부활(현재 성분묘 교회)했다.
예루살렘 성안 올드시티의 동편으로 황금빛의 바위돔(Dome of Rock)이 있는 저 템플마운트(성전산)는 세 종교의 성지다. 이슬람에선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 유대교에선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었던 종교의 중심 그리고 기독교에선 예수가 여기서 부활(현재 성분묘 교회)했다.
조성하 전문기자
조성하 전문기자
 2014년 9월 이스라엘 취재를 마치고서다. 텔아비브의 벤구리온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는데 아뿔싸, 귀국해보니 휴대전화가 없었다. 분실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게 정답이다. 번잡한 국제공항에서 그것도 외국에서 잃어버렸으니…. 그런데 나는 그러질 않았다. 대한항공을 통해 현지 공항에 분실 신고를 했다. 그리고 1주일 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휴대전화는 찾았고, 곧 대한항공 승무원을 통해 받게 될 거라는.

 기적과도 같았던 이 해프닝. 그걸 주워 신고한 누군가의 선의(善意)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런데 거기엔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되찾기를 포기하지 않게 이끈 힘인데,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건 벤구리온 공항의 철두철미한 보안검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알려졌다시피 이스라엘의 출·입국자 보안검색은 ‘극도’로 세심하고 철저하다. 당시도 공항의 보안검색은 4단계로 진행됐다. 그중 진입로에서 차를 세우고 승객을 일일이 확인하는 1차 검문, 탑승수속에 앞서 일대일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하는 2차 밀착검문은 이스라엘에서만 볼 수 있다.

 이런 철두철미한 검문검색의 배경을 우린 잘 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화약고 상황이 상존하는 곳이어서다. 두 국민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동거가 그 배경임도 역시. 땅을 빼앗겼다는 팔레스타인 자치주의 주민, 2000년 유랑 끝에 귀향한 이스라엘 국민이 그런 갈등의 상대다. 그렇다 보니 거기서 파생된 증오와 긴장은 전쟁도 불사할 만큼 깊고 심각하다. 그런데 그게 올해는 더 악화할 듯해 걱정스럽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고 해서다.

 현재 미국 등 이스라엘의 모든 수교국은 자국대사관을 ‘경제수도’ 텔아비브에 두고 있다. 이스라엘과 똑같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예루살렘을 ‘수도’로 공표해서다. 한 도시가 두 나라 수도가 될 수는 없는 일. 그렇다 보니 이들과 수교한 각국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표시로 ‘특명전권대사’의 집무처를 제3의 장소에 둔 것인데 미국의 이전 결심으로 그런 ‘평화’도 끝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앞으로 여러 나라가 그걸 따르다보면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그간 이스라엘과 갈등에 애써 중립을 견지해온 주변 아랍국가도 반발할 것이 틀림없어서다.

 이런 중동의 불안은 100년 전 러시아제정에 종지부를 찍게 한 볼셰비키 혁명부터 시작됐다. 혁명 와중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영국 정부의 외교 방침이 처음으로 공개돼서다. 그건 영국 외교장관 아서 밸푸어가 월터 로스차일드(당시 ‘금융제국’이라 불리던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표됐다. 물론 그건 이미 7개월 전 영국이 프랑스 러시아와 맺은 사이크스-피코 밀약(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중동의 영토 배분)의 확인에 불과했다. 세 나라는 이걸 쉬쉬해 왔는데 그만 볼셰비키 혁명 중에 이 밀약이 노출됐고 당사자 영국이 어쩔 수 없이 공개서한 형태로 밝혔던 것이다.

 이 소식에 아랍민족은 좌절했다. 한 해 전 영국의 꼬드김으로 개시한 오스만제국에 대한 독립무장 항쟁이 한창 불붙은 상황이었는데 영국의 아랍민족 독립국가 건설 지지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위선자 영국의 거짓 방침으로 드러났으니…. 당시 ‘아랍 왕(King of Arab)’ 후사인 빈 알리(성지 메카 수호부족장)는 영국을 믿었다. 1915년부터 14개월간 무려 열 통의 편지(후사인-맥마흔 서한)로 독립 지지를 표명해와서다. 아들(알리 빈 후사인)에게 1916년 ‘아랍대봉기(the Great Arab Revolt)’를 지시한 것도 그런 믿음과 희망에서였다. 영국도 토마스 로런스 대위까지 파견해 항쟁을 승리로 이끌도록 도왔으니 당연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그 아랍대봉기를 담고 있다.

 그런 역사를 반추한다면 2017년을 맞은 아랍국가와 국민의 소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의 고통과 고난, 아픔이 한 세기 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아랍민족을 이용하고 저버린 영국의 위선에서 비롯됐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중동은 단 하루도 평화가 없는 갈등의 땅이 되어버렸고 세 종교(가톨릭 이슬람 유대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그 갈등의 발상지와 상징으로 굳어졌다. 그 이름에 담긴 진정한 뜻과는 전혀 달리. 예루살렘은 고대 수메르인이 남긴 두루마리에 ‘평화의 도시’라 풀이돼 있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이스라엘#텔아비브#아랍민족#중동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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