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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나는 석유 찾는 여자, 대한민국 넘어 북극까지 파헤칠 것”

입력 2014-02-13 03:00업데이트 2014-02-13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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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호를 만나다]<4>한국석유공사 이성숙 탐사기술처장
각국의 에너지 전쟁이 심화되면서 자원을 찾아내는 탐사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성숙 한국석유공사 탐사기술처장은 국내 탐사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그가 석유시추선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안양=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각국의 에너지 전쟁이 심화되면서 자원을 찾아내는 탐사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성숙 한국석유공사 탐사기술처장은 국내 탐사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그가 석유시추선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안양=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여기를 파면 나올 줄 알았는데….’

2013년 3월 어느 날. 이성숙 한국석유공사 석유지질팀장(53)이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벽에는 지진파를 이용해 지질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탄성파 단면도’가 붙어 있었다. 이 팀장은 이어 물리검층 그래프도 다시 체크했다.

‘시추할 때 물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건, 분명 근처에 석유가 있다는 소리인데….’

답답한 마음에 괜스레 입안이 말라갔다. 벌써 6개월째였다.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넓이인 이라크 쿠르드 지역의 하울러 광구 작업이 좀처럼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 팀장은 데미르다그, 아인알사프라, 제이가우라, 바난 등 4곳에서 시추 중 우물처럼 땅을 아래로, 아래로 뚫어 석유가 나오기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었다.

석유公 35년 역사상 첫 여성 처장

이 팀장의 도전 자체가 무모했다는 수군거림도 주변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미 외국의 유명한 회사들이 쿠르드 지역에 야심 차게 들어왔다가 허탕만 치고 철수한 터였다. 치안도 불안해 무장한 보디가드 없이는 지질 조사를 다니기도 힘들었다.





띠리리.

갑자기 이 팀장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지는 하울러 광구 시추현장. 그곳은 새벽일 텐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혹시? 이 팀장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현장 직원의 달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1차 탐사정 플레어링(flaring) 성공했습니다! 불이 붙습니다! 찾았어요!”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한꺼번에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경기 안양시 한국석유공사 본부 사람들은 더덩실 춤을 췄다. “와! 나왔다! 나왔어!”

처음 석유가 펑펑 쏟아진 곳은 이라크 데미르다그였다. 그곳에서는 원유산출시험을 통해 하루 1만 배럴의 석유가 나왔다. 이어 10월과 12월에는 나머지 2곳에서도 원유가 발견됐다. 총 4곳에서 3곳 성공. 보통 1억 배럴이 넘으면 대형 유전이라고 한다. 데미르다그에서 발견된 잠재 자원량은 5억5000만 배럴에 달한다. 그야말로 초대형 유전인 셈.

이 팀장은 이 프로젝트를 이끈 실무 팀장이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올 1월 탐사기술처장으로 승진했다. 한국석유공사에는 25개의 처·실이 있는데, 35년 역사상 여성이 처장을 맡은 적은 처음이다. 그녀는 4개팀을 이끄는 수장이다.

10일 공사 본부 사무실에서 이 처장을 만났다. 당시 소감을 물었다. 그가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쑥스러운 표현이긴 한데…. 솔직히 말할까요? 제 마음속에는 ‘대박’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 우리 독자 기술로 동해 대륙붕 가스유전 발굴

이 처장이 석유탐사에 발을 딛게 된 것은 1992년. 당시 그는 지질학 박사학위를 딴 후 지질자원연구원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던 것일까. 마침 석유공사에서 국내 동해 대륙붕 시추와 관련된 자료 분석 업무를 연구원에 의뢰했다. 평소 국내 대륙붕을 꾸준히 연구해 왔던 그가 적임자로 지목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국내 석유자원을 개발할 기술과 정보가 없었다. 동해 광구의 경우에도 외국 에너지 회사들에 탐사와 시추를 모두 맡겼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돌아갔다.

중동전쟁을 시발로 1973년과 1979년 ‘석유파동(오일쇼크)’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급등한 석유 가격 때문에 한국에서도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이 이듬해인 1974년 24.8%로 수직 상승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자원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1979년 공사(당시 이름은 한국석유개발공사)를 설립한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이후 국내 석유탐사 작업은 계속 이어져 왔으나 성과가 없었다. 외국 회사들도 모두 철수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 지질 전문가들은 “동해 대륙붕에 엄청난 자원이 묻혀 있다”라는 주장을 계속 제기했다. 어딘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 지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이 처장이 당시 맡은 업무가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동해 대륙붕서 독자기술로 발굴

그는 외국 회사들의 탐사 실패 원인에 대해 정밀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이어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법을 적용해 새로 분석했다. 6년간 그는 공사와 일을 같이했다. 이제 그의 연구 노하우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산이 됐다. 1998년 4월, 공사는 프로젝트 연구원이었던 그를 아예 과장직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3개월 후인 1998년 7월, 울산 남동쪽 58km 지점에서 천연가스층(동해-1 가스전)이 발견됐다. 석유공사가 국내 독자 기술로 ‘대업’을 이뤄낸 것이다. 동해-1 가스전은 2000년 상업화 선언 이후 본격 개발에 들어가 모든 개발은 2008년 11월 완료됐다. 현재 하루 평균 생산량은 천연가스 5000만 ft³, 원유는 1000배럴에 달한다. 원유 1000배럴(15만9000L)은 자동차 2만 대를 하루 동안 운행할 수 있는 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석유가 그렇게 많이 나온다고요?” 기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이 처장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95번째 산유국이에요. 언젠가 방송을 보는데 남자 아나운서가 에너지 관련 소식을 전하며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에서 더욱 아껴서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냥 웃었어요.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 석유탐사 성패가 개발 성공 좌우한다

석유 탐사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여기다’ 싶은 곳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것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란다. 이 처장은 벽에 붙어 있는 빨간색 선, 파란색 선, 굵은 선과 가는 선, 흰색 표시들이 가득한 탄성파 도면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탄성파 단면도’라는 거예요. X선 사진 같죠? 틀리진 않아요. 땅의 X선이라 할까? 우리 몸 안에 뭐가 있는지 영상촬영장치로 쭉 훑듯이 땅을 스캐닝하는 거죠. 이걸 보면 5000m 밑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단면도에 있는 굵은 푸른색 선과 흐릿한 선은 지하 지층에 무엇인가 있다는 뜻. 산봉우리처럼 볼록 올라간 곳은 가스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곳을 찾아 파면 석유가 나오기도 한다. 이런 분석 작업은 석유탐사에서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이 과정이 면밀하고 정확하게 이뤄져야 시간과 돈, 모두를 줄일 수 있다.

사실 원유를 찾아내 생산까지 하는 과정은 매우 길고 복잡하다. 탄성파 도면을 분석하는 데만 8개월, 나머지 자료 분석하는 데 1년, 시추 기간 6개월…. 이후 산출 시험과 매장량 평가 등을 하면 최소한 3년 이상 소요되며 생산까지는 10년이 필요하다.

원유가 발견되면 미리 맺은 ‘생산물 분배 계약’에 따라 90%는 자원보유국의 몫이 된다. 개발한 회사는 10%를 가져간다. 외국 유명 석유회사들의 탐사성공률이 10% 정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10번 중 9번은 빈손으로 철수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초기 자료 분석을 치밀하게 해 석유가 있을 만한 곳에만 구멍을 뚫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지혜가 돋보인 사례 하나.

“분명 입찰할 때 가능성이 큰 지역인데, 막상 들어가 보니 아무리 애를 써도 석유를 못 찾을 때 좌절감은 아주 커요. 하지만 외국 메이저 회사들까지 포기한 곳을 우리가 성공했을 때는 ‘우리도 경쟁력이 있구나’란 생각에 기쁨이 배가 돼요. 베트남 15-1광구가 그런 사례였어요.”

○ ‘지방대’ ‘여자 이공계’란 틀을 깨라

참으로 억척스러운 직업. 16년간 이 처장은 탐사 조사를 하기 위해 별의별 국가를 다 다녀봤다.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나이지리아와 콩고민주공화국, 수단, 아프리카의 오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도 강행군

“2006년 아프리카 국가들을 방문할 때 에볼라 바이러스가 발병해 몸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외교부에서는 빨리 귀국하라고 하는데, 이곳에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냥 강행군을 했죠.”

그때만 해도 이 처장처럼 ‘고생하는’ 여직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성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시추 현장으로 장기간 파견 나가는 일도 흔해졌다. 현재 한국석유공사의 직원 1296명 중 229명이 여성이다.

그는 지방대 출신이다. 여성에 지방대 출신…. 이중 차별에 시달리지는 않았을까. 할 말이 있단다.

“지방대라는 이유로 스스로 ‘나는 안 돼’라고 위축돼서는 안 돼요. 요즘에야 이공계에 여성들이 많이 간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여자가 지질학이나 자원공학 배우는 경우도 적었어요. 그런 전공을 선택한 제게, 부모님은 격려를 해주셨죠.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고요. ‘지방대’에, 그것도 ‘이공계 여자’가 어때서요? 스스로 가두지 말고 좀 더 자신감과 열정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외국의 에너지 자원을 더 많이 끌어오는 게 꿈이라는 이 사람. 다음 목표는 심해(深海)라고 했다. 수심이 1000m를 넘는 곳, 아직 속살을 보여 본 적이 없는 북극의 저 깊은 곳. 그의 탐사 열정은 아직도 목이 마르다.

▽프로필

― 1980년 2월 대전여자고등학교 졸업
― 1984년 2월 충남대 해양학과 졸업
― 1992년 8월 충남대 지질학 박사 과정 졸업
― 1998년 4월 한국석유공사 입사
― 2006∼2007년 기술지원실 기술평가팀장
― 2010∼2012년 석유탐사실 석유지질팀 담당역
― 2013년 탐사기술처 석유지질팀장
― 2014년 1월∼ 탐사기술처장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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