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김화성]겨울바다는 밥상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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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겨울이 깊어간다. 입안이 영 타분하다. 벌써 입속에서 슬슬 군내가 나기 시작한다. 도무지 찰싹 입천장에 달라붙는 음식이 없다. 큼큼 구수하던 된장찌개가 이젠 시들어 탑탑하다. 매움 칼칼하던 김치찌개도 이미 그 맛이 숙지근해졌다. 고릿한 청국장 냄새가 온 집안에 퀴퀴하다. 잇몸이 근질근질, 혓바닥이 떠름 밍밍하다. ‘입 몸살, 혀 몸살’에 자못 찜부럭이 심해졌다. 발끈! 나도 모르게 뼛성까지 낸다.

그렇다. 뭐니 뭐니 해도 요즘 으뜸 맛은 흑산도 홍어회다. 쫄깃쫄깃 인절미 씹는 맛이 천하일품이다. ‘삭힌 홍어’나 ‘홍어찜’을 어찌 이에 비하랴. 씹을수록 깊고 은근한 향이 난다. 동지 어름부터 홍어는 알을 낳으러 흑산도 부근으로 몰린다. 등짝과 배래기에 ‘꼽(점액질)’이 잔뜩 스며나 끈끈해진다. 살이 차져 한 점 입에 넣으면 쫀득쫀득 쩍쩍 달라붙는다. 꼬들꼬들 달곰삼삼하다. 볼퉁이와 어금니 잇몸 사이에 홍어 살점을 조금치 쟁여두고,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을 은근슬쩍 들이부으면, 어찔어찔 그저 온몸이 자지러진다.

홍어는 연잎을 닮았다. 홍어 한 마리가 ‘홍어 한 닢’이다. 방석만 한 게 맛있다. 반질반질 끈적끈적한 코숭이를 첫째로 친다. 홍어코를 소금장에 찍어 한 입 넣으면 ‘쎄에∼’한 맛이 혓바닥에서 코를 타고 올라가, 금세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정수리가 시큰하고 코끝이 찡하다. 갑자기 콧속이 뻥! 뚫려 신천지가 열린다.

오호! 눈꽃이 펄펄 흩날린다. 숫눈, 풋눈, 복눈, 포슬눈, 가루눈, 싸라기눈, 도둑눈, 갈기눈…. 동해안은 온통 설국(雪國)이다. 귀 어둡고, 눈먼 자들의 하얀 나라. 도루묵이 지천이다. ‘도루묵 인생’들이 저마다 주점에 앉아 배가 터질 듯한 도루묵을 굽는다. 굵은 소금을 실눈 내리듯 살짝 뿌리고, 약간만 노르스름하게 굽는다. 바싹 구우면 한순간에 ‘말짱 도루묵’ 맛이 된다.

겨울 도루묵은 ‘다산성(多産性)’이다. ‘살 절반, 알 절반.’ 알이 한 마리에 무려 1000∼1500개나 들어 있다. 내장은 있는 둥 없는 둥, 머리 쪽에 손톱만큼 붙어 있다. 알이 토옥♪∼톡♬ 터진다. 석류알처럼 오도∼독♬ 리드미컬하게 씹힌다. 이 틈새를 넘나들며 미끄덩거린다. 명주실 같은 끈끈이 가닥이 이를 엉기고 감아 돈다.

산다는 것은 정말 ‘말짱 도루묵’일까. 정의와 진리, 사랑과 우정, 꿈과 희망 같은 것들은 한낱 도루묵에 불과한 것일까. 구운 도루묵 껍질을 죽 찢으면 알이 구슬처럼 차르르 쏟아져 나온다. 살 한 점에 소주 한 잔, 알 한 술에 맥주 한 잔…. 밖에선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미친 듯이 퍼붓는다.

허허 쓸쓸. 사내들은 왜 술만 퍼마시며 저를 썩히는가. 신새벽 쓰린 속. 부산이나 통영 남해안 어디쯤의 물메기탕이 어른어른 밀물져온다. 금세 혓바닥이 달뜬다. 물메기는 날것으로 끓여야 제맛이다. 아차 하면 살이 다 풀어져 버린다.

물메기는 흐늘흐늘 흐물흐물하다. 영락없는 고주망태 술꾼이다. 세우자마자 주르륵 널브러진다. ‘민물메기와 닮았다’고 해서 물메기다. 삼척 동해사람들은 ‘곰치’라고 부른다. 속초, 주문진에서는 ‘물곰’이다. ‘물텀벙’이라고 하는 곳도 많다. 그물에 걸려 올라오면 다시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때 “텀벙” 소리가 난다고 해서 ‘물텀벙’이다.

물메기는 도루묵보다 더 못생겼다.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다. 그러면 좀 어떤가. 그 탕은 맑고 시원하기만 하다. 후루륵! 소리 내어 국 들이켜듯 먹는 맛이 스리슬쩍 그만이다. 껍질과 살집 사이의 점막 덩어리가 단연 최고다. 뜨끈하고 물컹한 그 덩어리가 미끄덩!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배 속이 뜨뜻해지면서 환해진다. 천연 술해독제 ‘물렁 수류탄’이다.

그렇다. 겨울바다는 밥상이다. 거제 앞바다 대구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 ‘눈 본 대구, 비 본 청어’다. 눈 내릴 때는 대구, 이슬비 오는 봄엔 청어다. 숭어도 펄떡펄떡 높이뛰기가 한창이다. 발그레 복숭아빛 감도는 살점이 달큼하다. 굴도 배춧속처럼 꽉 차 오동통하다. 고기잡이집 딸내미 얼굴은 까맣지만, 굴집 딸 얼굴은 뽀얗다던가.

아, 이것은 또 무엇인가. 졸깃졸깃 옴죽옴죽, 찝찔하면서도 비릿하고, 달짝지근하면서도 감칠맛이 혀끝에 뱅뱅 맴도는, 아, 이 그지없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오호라, 바로 벌교 꼬막이로다.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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