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죄책감의 덫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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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우리가 느끼는 여러 감정 중에서 특히 떨쳐 내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죄책감’이다.

건강한 죄책감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죄책감 때문에 올바르게 행동하려 애쓰고, 종교를 갖기도 하고, 또 나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더 챙겨주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죄책감은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나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거짓 죄책감 때문에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거나 하는 상태를 ‘죄책감의 덫(Guilt Trap)’에 빠졌다고 부른다.

우울감 때문에 진료실에 찾아온 A 씨는 시어머니 말이라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결혼한 후 10년 동안 A 씨는 한 번도 남편과 아이들하고만 여름휴가를 간 적이 없고 시어머니를 꼭 모시고 갔다. 한 번은 직장에서 정리해고와 같은 큰일이 많아 어수선할 때 깜박 잊고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보내는 걸 잊었다.

시어머니는 그 후 가족 모임 때마다 그 이야기를 꺼내 A 씨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고생하면서 아들 키워 봤자 소용없다, 이건 다 너를 위해 하는 이야기이다, 도리를 가르치는 것뿐이다, 다른 집 자식들은 얼마나 잘하는 줄 아느냐 등의 훈계가 이어졌다. 며느리가 하는 봉사 활동을 꼬집으며 남한테 그렇게 잘할 시간이 있으면 가족에게 더 잘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필자가 정신과 의사이어서 극단적인 예만 접하게 되는지는 몰라도 세상엔 드라마 이상의 일들이 꽤 일어나는 것 같다.

A 씨 남편은 주말에 아이들과 공원에 산책을 나가도 뭔가에 쫓기는 듯 즐기지 못했고, 그렇다고 어머니를 뵈러 가는 것도 아니면서 서둘러 집에 돌아와 마치 나만 즐거울 수는 없다는 듯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A 씨 남편이 걸린 죄책감의 덫은 ‘생략을 통한 왜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돈을 몇 번 늦게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A 씨 남편은 다른 형제들이나 다른 집 자녀들이 하지 않는 고가의 건강 검진을 매년 부모님께 시켜드리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쏙 빼놓은 채 못한 것만 강조한 건 사실 왜곡이다. 최근 우울증에 걸린 A 씨는 친척 모임에 가면 다들 자기네를 이기적인 자녀라고 수군대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게 되었다.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큰딸은 살림 밑천이다’는 이야기에 동생들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고도 조그마한 일에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 우리나라의 큰딸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큰딸의 비애는 무척 크다.

이런 죄책감의 덫에서 왜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마땅히 행해야 할 부모에 대한 효나 동생과 자녀에 대한 의무와 ‘죄책감의 덫’은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아 무 자르듯이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는 모두 ‘사회적 동물’인 까닭일 것이다.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게재된 한 연구에서는 공을 주고받으며 터치다운을 해야 하는 컴퓨터 게임을 수행하게 하면서 참가자들의 뇌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 기기를 이용해 촬영했다. 참가자는 실제로는 컴퓨터만을 상대로 게임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참가자들과 이 게임을 하고 있다고 믿게 하였다. 그런데 이 게임을 하면서 다른 참가자 역할을 연기하는 컴퓨터는 때때로 실제 참가자를 배제한 채 게임을 한다. 그러면 이 상황에 참가자는 다른 참가자들로부터 배척되는 데 따른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신체적인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뇌 부위가 활성화한다.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즉 가족 그룹이나 친인척, 친구 그룹에서 나쁜 자식이라고, 나쁜 엄마라고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등의 상황은 비난받는 당사자에게는 신체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고통인 것이다. 그러니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냥 상대가 원하는 대로 자꾸 해주게 되는 것일 수 있다.

누구든 내게 지나친 요구를 할 때 비난 받고 소외 받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온 세상이, 온 시간이 자기 소유인 신(神)도 108배나 기도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yes’라고 요구를 들어주거나,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신도 ‘no’라고 거절하는데 사람이 못하는 일이나 하기 싫은 일을 거절한다고 해서 ‘나는 못난 부모다’ ‘나는 형편없는 자녀다’ ‘나는 이기적인 팀원이다’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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