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일본은 ‘보통이상의 국가’가 돼야 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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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논설위원실장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일본 뉴스가 늘어나봤자 좋을 일이 없다더니 요새가 꼭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아베 신조 총리의 등장 이후 한일관계를 좀 아는 사람치고 말하지 않고, 글 쓰지 않은 이가 없다. 그렇다고 똑 부러지게 해결된 것도 없다. 이번 갈등은 왠지 오래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이 달라져서다.

가장 큰 변화는 한국의 불만이나 항의를 달가워하지 않는 일본 지식인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또 그 얘기냐”고 불평하면서도 듣는 척은 했는데 요즘은 응대에 짜증이 묻어난다. ‘우경화(右傾化)’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아베의 총선 압승을 한사코 “민주당에 실망해 자민당을 택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극우(極右)라는 말에 특히 거부감이 심하다. G2(주요 2개국)라는 용어에도 불만이 많다. 한국이 중국만 우대하고(속으로는 중국에 아부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홀대한다는 섭섭함을 감추지 않는다. 한국이 경계할 나라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 일당독재에다 국방비를 펑펑 써대는 중국 아니냐고 되묻는다.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일본, 키워드는 ‘폐색감(閉塞感)’이란 단어다. ‘고립감’이나 ‘무력감’ 정도의 뜻이다.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에 추락하는 국제적 위상, 엎친 데 덮친 대지진, 초고령화로 활기를 잃어가는 사회, 일본은 몹시 외로움을 타고 있다. 희미하나마 아베에게서 옛 시절의 영화(榮華)를 보고 몰표를 던진 것은 아닌지, 하고 분석해 본다. 20, 30년 전 잘나가던 일본이 아니라 요즘의 프레임으로 일본을 봐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제대로 된 답이 나온다.

아베 총리가 준비한다는 ‘아베 담화’는 파란을 일으킬 것이다. 한일이 얽힌 쟁점은 크게 독도, 교과서, 일본군 위안부, 보통국가론, 우경화 등이다. 아베 담화는 이 모든 사안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다. 일본의 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 일본군 위안부의 국가 관여를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교과서를 편찬할 때 이웃국가를 배려한다는 미야자와 담화(1982년)는 나름대로 완충 역할을 해왔다. 우리는 독도, 교과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제국주의에서 빚어진 일란성 다생아로 보지만 일본은 쪼개서 대응한다. 독도는 국제법으로, 교과서는 문부과학성의 권한으로, 일본군 위안부는 개인의 선택으로 접근한다. 결론은, 그래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거다. 추정컨대 ‘아베 담화’는 미래와 화해를 얘기하면서도 3대 담화의 취지마저 후퇴시킬 가능성이 크다.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오는 평지풍파다. 한국으로서는 타협할 수 없는 이들 사안에 대해 하나하나 줄기차게 일본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보통국가론은 재단이 복잡하다. 헌법을 고쳐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개편하고, 방어만 한다는 전수(專守)방위개념을 없애며,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자국이 공격받은 것으로 간주해 반격할 수 있는 집단적자위권을 확보하겠다는 게 보통국가론의 요지다. 언뜻 들으면 무섭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갖고 있는 권리인 데다 하겠다면 마땅히 제어할 방법도 없다. 문제는 일본이 또다시 패권주의로 달려갈 가능성이다. 일본은 절대로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패전 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일본은 주변국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개학이 다가오는데 너무 오래, 너무 많은 숙제를 미뤄왔다. 우경화 논란에 대해 일본은 “일본 전체가 우경화된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억울하다”고 말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일리가 없지 않다. 문제는 사회지도층이다. 아베 총리는 요즘 자신의 발언들이 “우익은 극소수”라는 기존의 주장을 얼마나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까 모르겠다.

일본과의 관계를 단칼에 회복시킬 수술방법은 없다. 산업구조는 노동집약적인 중후장대(重厚長大)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경박단소(輕薄短小)로 옮아가는 게 대세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거꾸로 가야 할 듯하다. 두 나라 모두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고(重), 정치가 삐걱대도 사람-물건-돈의 교류는 두텁게 하며(厚), 일본의 가치를 남북통일 때까지 길게 내다보고(長),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공동 대응한다는 대국적인 견지에서(大)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병을 다스리며 함께 사는 한방적 해법이다.

이지메(집단괴롭힘)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는 일본어는 이미 국제공용어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주변국을 이지메하다 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요즘은 뉴욕타임스가 아베의 과거사 부정을 ‘수치스러운 충동’이라고 질타할 정도로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히키코모리가 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이 골방을 박차고 나와 ‘공기를 읽길’(분위기를 파악하길) 희망한다. 현실에 걸맞은 일본을 만들자는 ‘일본의 리얼리즘’이라는 논의도 과거회귀나 현상타파에 머물지 말고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미래상을 상정해야 맞다. 그게 진정한 리얼리즘이다.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며 국제사회에 숱한 기여를 해온 선진국이다. 마음만 잘 먹으면 ‘보통국가’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존경받는 ‘보통이상의 국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훌륭한 이웃과 더불어 살고 싶다.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ksshim@donga.com
#일본#보통국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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