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원칙보다 아름다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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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입국한 딸을 데리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김포공항에서 여권을 보관하고 있으니 찾으러 오라는 전화였다. 여권을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딸은 가방을 샅샅이 뒤지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어디서 떨어뜨렸지? 그런데 공항 직원은 우리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랴부랴 온 길을 되짚어 공항에 다녀온 딸이 현관문을 들어서며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역시 우리 엄마는 모범생!”

어떻게 연락처를 알고 득달같이 전화가 걸려 왔는지 궁금했던 우리의 의문이 풀렸다. 여권의 맨 뒤에 주소와 연락처를 착실하게 적어 놓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필체였다. 언제 썼는지 나도 기억조차 없지만 딸이 무심하게 빈칸으로 놔둔 것을 내가 대신하여 꼬박꼬박 채워 놓은 것이다. 이런 성격인 나를 ‘범생이 엄마’라고 은근히 놀리던 딸이 이번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원칙대로 사는 게 오히려 편한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원칙대로 연락처를 적는 간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중국 거주비자를 다시 신청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다음 날 딸과 함께 종합병원에 갔다. 진료를 받은 뒤 X선을 찍기 위해 검사실 앞으로 가보니 대기자 수십 명이 북적거리고 대기시간은 30분 이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할머니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가 계속 칭얼거리며 집에 가자고 졸라대고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영상기사에게 먼저 촬영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안 돼요, 할머니. 순서대로 해야 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할머니는 딱히 누구랄 것 없이 붐비는 사람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양해를 구했지만 사실 누가 선뜻 나서서 “먼저 하세요”라고 말할 권한은 없었다. 그래서 모두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 아이는 계속 칭얼거리고 할머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이때 한 사람이 나섰다.

“할머니랑 아이를 먼저 들어가게 하면 안 될까요?” 원칙주의자인 나도 반가웠다. 다행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촬영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때, 이런 때는 원칙을 넘어서는 것도 좋은 일이지?” 딸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딸도 빙그레 웃으며 동의했다. 살아가면서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원칙을 넘어서는 것도 아름답다. 사람이 먼저라면 말이다.

윤세영 수필가
#김포공항#여권 분실#원칙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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