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의 ‘100세 시대’]‘늙어간다는 것’의 불안 노리는 사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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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58세의 A 씨는 최근 영업하던 가게를 문 닫으면서 10년 넘게 부어왔던 보험회사의 연금보험을 중도 해지했다. 매월 200만 원이 넘는 돈을 적립했지만 더이상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다. 중도 해지에 따른 손해는 엄청났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너무나 속상했다. 더 씁쓸한 건 보험회사가 보여준 태도였다.

보험 가입을 권할 때 “일을 그만둔 후에 9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최소한 10억 원이 필요하다.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어떻게 할 작정이냐?”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버거운 액수의 연금보험에 가입하게 했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담당 직원은 “중도 해지로 인한 모든 손해는 계약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힘들더라도 보험료를 계속 붓는 수밖에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A 씨는 자신이 보험회사의 ‘불안 마케팅’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슷한 시기에 국민연금에 가입해 자신보다 적은 보험료를 적립했던 친구가 좋은 조건으로 연금을 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더 실감했다.

B 씨 집에서는 얼마 전 한바탕 난리가 났다. 85세 어머니가 2남 2녀 자녀들에게 350만 원을 호가하는 의료기를 사야겠으니 돈을 보내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했기 때문이다. B 씨 집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지나칠 정도로 건강을 염려하는 어머니는 몸에 좋은 거라면 뭐든 구입하고 싶어 한다. B 씨 형제들은 돈도 부담스러웠지만 의료기의 효능에 대해서도 신뢰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면서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러느냐? 빨리 돈 보내라”고 재촉을 한다.

요즘 은퇴자나 어르신을 위한 이른바 ‘고령친화산업’이 성업 중이다. ‘실버타운’으로 불리는 유료 노인복지시설 같은 고가 제품에서부터 건강식품이나 노화방지용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이 활기를 띤다.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의하면 2010년 현재 고령친화산업의 시장 규모는 33조2241억 원이며, 2020년까지 연평균 14.2%씩 성장해 2020년에는 124조9825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고령친화산업의 등장과 발전은 은퇴자나 어르신의 삶의 질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선진국일수록 고령친화산업이 발달했다. 오랜 불황에 허덕이는 일본도 노인을 위한 산업만은 예외다. 미국도 눈이 침침해진 베이비붐 세대를 위해 책 크기와 글자를 키우는 출판사가 늘고 있고, 그렇게 만든 책도 잘 팔린다고 한다(이런 산업은 발달할수록 좋을 것 같다!). 복고풍 자동차 등을 내세운 ‘향수 마케팅’도 활발하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건 나이 든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불안 마케팅’도 극성을 떤다는 점이다. 이동식 상점 형태로 여기저기 떠도는 장사꾼에게 넘어가 불필요한 물건을 구매한 어르신들의 피해 사례는 더이상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특히 외롭고 건강에 대한 불안감이 높은 어르신들이 집중 공략의 대상이 된다.

몇 년 전 혼자 사는 남자 어르신이 2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강원도에 새로 짓는 유료 노인복지주택 보증금으로 맡겼지만,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모두 잃고 말았다는 딱한 사정이 보도된 적이 있다. 또 50∼70대 여성 고객을 꾀어 성폭행한 뒤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낸 40대 건강식품 판매사원이 붙잡히는 등 흉악한 범죄도 잇따르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정부도 마냥 손을 놓을 수만은 없다고 본다. 노인복지용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표준규격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필요하고, 어르신 대상 서비스에 대한 윤리강령도 마련해야 한다. ‘고령친화우수제품’을 지정하는 등 지도·감독 장치도 시급하다.

나이 든 소비자들도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 능력을 가져야 한다. 소비자로서의 권리의식도 갖춰야 하고, 주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음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은 미래에 대한 지나친 불안감을 버리는 일이다. 노년에 대한 준비는 필요하지만 지나친 걱정이나 염려는 금물이다. 자신에게 꼭 맞는 ‘맞춤형’ 준비가 필요한 이유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보험#불안 마케팅#고령친화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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