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필직론’]‘찌라시’는 무시하는게 상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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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 정도 벗어난 산케이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직후 7시간 동안 사라져 무엇을 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의 서울 특파원을 검찰이 명예훼손죄로 기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산케이 신문은 미혼 여성, 그것도 남의 나라 대통령의 남자 문제를 건드렸다. 어떤 언론이라도 그런 기사를 보도하기 위해서는 용기만으론 안 된다. 여느 사건보다 훨씬 까다로운 검증을 거친 명확한 증거를 가져야 하는 것은 저널리즘 상식 중의 상식이다. 검찰 수사에서 산케이신문이 보도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했다는 얘기가 아직 없다.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보도가 될 공산이 커 보인다.

언론은 철학적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언론의 진실’은 사실들을 엄격하게 검증한 결과이다. 무릇 언론이라면 이념을 뛰어넘어, 기사의 정확성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

‘찌라시’는 ‘주의나 주장을 널리 전하는 종이쪽지를 속되게 이르는’ 일본말.

흔히 저잣거리의 소문을 파는 정보지를 ‘찌라시’라 일컫는다. 그 일본말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만약 이번 보도에 정확한 증거를 대지 못하면 산케이신문은 그야말로 찌라시라 불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찌라시 같은 신문을 ‘타블로이드’라 부른다. 수십 년 전 암살당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백악관에 나타났다며 그가 창가에 서있는 모습을 합성해 만든 사진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도하는 미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이나 산케이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 한국과 일본은 아주 예민한 관계이다. 일부 일본의 극우파들이나 한국의 좌파들은 박 대통령을 세차게 건드린 산케이신문을 편들지도 모른다. 진실이 아니라도 한국의 대통령을 망신 주었으니 통쾌하다는 유치한 일본인의 애국심, 밉기 그지없는 박 대통령의 치부가 드러나 고소하다는 한국인의 비뚤어진 반발심을 보며 산케이신문이 “한 건 했다”고 우쭐한다면 그것은 언론의 정도(正道)가 아니다.

○ 언론과 싸운 대통령들

그러나 이번 산케이 보도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청와대의 대응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명예훼손을 법으로, 그것도 형법으로 다루는 것이 적절하냐는 것이다.

1908년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프랑스로부터 파나마 운하를 사들이는 과정에 자신의 친인척이 개입해 부정을 저질렀다고 보도한 신문의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 등을 형법상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백악관에 기자실을 처음 마련하는 등 언론을 이해하고 인정한 미국 최초의 대통령으로 꼽힌 루스벨트였건만 “고의적 허위보도로 국민을 중상 모략한 이들을 단죄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며 노발대발했다. 워싱턴 대배심은 이들을 기소했으나 1심 법원이 사건을 기각했다. 연방대법원이 신문의 승소를 결정한 확정 판결을 내리면서 루스벨트는 언론의 응징에 실패했다.

미국은 건국 이래 237년 동안 루스벨트 말고 어떤 이유에서든 ‘대통령은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거나 소송을 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뒤집은 대통령이 없다. 대통령은 국민의 어떤 비판이나 비난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더욱이 미국에서 언론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처벌하는 일은 오래전에 없어졌다. 미국의 언론자유를 세계가 부러워하는 이유들이다.

2008년 이탈리아의 한 일간지는 ‘기아(飢餓)와 로마에서의 방종한 여행’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유엔식량농업기구 정상회의 참석차 이탈리아를 찾았다가 14만 유로가 넘는 보석 쇼핑을 했다고 보도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명예훼손이라며 이탈리아 검찰에 기자들을 고소했다. 2013년 로마 형사법원은 해당 기사가 허위라며 일단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와 이를 싣겠다고 판단한 편집국장에게 각각 400유로와 300유로 벌금형과 함께 4만 유로를 배상하라고 선고한 것이다. 기자들이 항소해 사건은 진행 중이다.

이 일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겉으로는 승자처럼 보였어도 사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세계의 언론이나 관련 단체들은 이 재판을 계기로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언론의 갈등, 유럽 국가 가운데 매우 드물게 언론에 의한 명예훼손을 형법으로 다스리는 이탈리아의 열악한 언론 상황을 다시 주목했기 때문이다. 올해 7월 ‘언론인 보호를 위한 위원회’는 이탈리아 정부에 형법상 명예훼손죄를 폐지해 유럽과 국제 기준에 맞추라고 촉구한 바 있다. 2014년 프리덤하우스의 세계 언론자유 순위에서 197개국 가운데 이탈리아는 64위, 아르헨티나는 106위이다.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10년 미국 시사 잡지 ‘타임’이 세계를 이끄는 여성 4위로 꼽을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남편과 자신의 재산을 두고 부정부패에 의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언론을 ‘조폭’ ‘파시스트’라 공개 공격할 정도로 언론을 싫어한다. 대통령치고 언론과 원만한 사람은 별로 없지만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유독 심하다. ‘언론과의 갈등’은 그의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다.

○ 형법상 명예훼손죄는 폐지

형법상 명예훼손죄는 봉건시대 영국의 왕이나 귀족들은 백성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므로 권위가 훼손될 비난이나 책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권위주의 이론이다. 그것은 이제 전 세계에 걸쳐 폐쇄 사회의 특징으로까지 폄하된다. 스리랑카 가나 멕시코 루마니아 키르기스스탄 영국 아일랜드 등 수십 개 나라가 완전 폐지나 부분 폐지를 했다.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등에는 법이 존재는 하나 언론에 적용된 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살아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선 당시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잡지 발행인 등 5명을 고발토록 했으며 이들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 언론단체들은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명예훼손에 법적 대응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법상 명예훼손죄로 다루는 것 모두 선진민주주의 국가가 하는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언론자유 순위는 68위이다. 왜 이렇게 세계의 평가가 낮은가.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는 법과 관행을 대통령도 활용했기 때문이다. 감정을 가라앉힌 이성의 판단이 필요하다. 박대통령이 전 세계에 페르난데스 대통령처럼 비쳐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쭙잖은 ‘찌라시’라면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명예훼손#언론#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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