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38>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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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 ―이가림(1943∼2015)

송코이 강가 마을에서 연초록 풀잎으로 태어난 손, 땡볕에 그을린 웃음 깔깔거리며 고무줄놀이 하던 손, 바구니 가득 망고를 따던 손, 한 모금 처녀의 샘물을 움켜쥐던 손, 불타는 야자수 그늘 아래 물소를 몰던 손, 느닷없이 M16 총알의 탄피가 스쳐간 손, 칼에 찢긴 손, 밧줄에 묶인 손, 코브라의 목을 조른 손, 송장을 불태운 손, 빵과 옷을 훔친 손, 가짜 입국사증과 약혼반지를 바꾼 손, 피의 강을 헤엄쳐온 손, 대양에 던져져 살려달라 살려달라고 외친 손, 어머니 사진을 찢어버린 손, 아아, 마침내 남의 땅 구정물통에 빠진 손, 인천 신포동 술가게에 팔려온 손, 악어 잔등보다 더 거친 손, 내가 입 맞추고 싶은 거룩한 슬픈 삶의 손.

‘월남 패망’ ‘보트피플’이 주요 뉴스 용어였을 때의 비애 공포 암울함이 두근거리며 떠오른다. 많은 한국인이 남의 일 같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라가 망해도 제 나라에서이건, 남의 나라에서이건 멀쩡히 사는 사람이 있겠지만 대다수 국민의 삶은 파괴된다. ‘세계인’이나 ‘세계정신’이라는 말도 제 조국이 건실할 때나 주장할 수 있을 테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은 ‘이민’ 생활도 힘들 텐데 ‘난민’의 삶이라니 얼마나 떫고 쓰고, 아리고 쓰릴까. 화자는 술집에서 만난 ‘한 월남 난민 여인의 손’에서 그 험난한 자취를 본다. 손 모양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삶의 행적으로 만들어진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에, 그것도 서울이 아니고 ‘인천 신포동’에 흘러든, 우리와 생김새와 말투가 다른 여인. 그 ‘악어 잔등보다 더 거친 손’의 임자에게 화자는 깊은 연민을 느끼며 살갑게 말을 붙였을 테다. 모처럼 대하는 따뜻한 사람에게 여인은 그동안 젖을 겨를 없었던 향수에 젖으며 지나온 얘기를 들려줬을 테다. 정체성을 증명하는 지문도, 운명의 지도인 손금도 희미하게 지워진 손의 역사. 그 역사는 곧 ‘월남’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여인만 그리 살았으랴. 기구하다는 말도 모자라는 기막힌 삶에 화자는 여인과 함께 눈시울을 적셨으리라. 하지만 당신의 삶, 슬프지만 거룩하지 않은가!

이가림의 많은 시편에는 ‘가까스로 다다른 곳은/포클레인들 무섭게 으르렁거리는/공사장 근처/온갖 기름들 엉겨 떠 있는/시커먼 웅덩이’(시 ‘어린 꼬리치레도롱뇽의 하루’)로 표상되는 숨통을 막는 현실에서 있는 힘 다해 가까스로 사는 숨 받은 것들에 대한 연민에 찬 경이가 담겨 있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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