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36>밤의 아주 긴 테이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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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아주 긴 테이블 ―윤고은(1980∼ )

내 집은 여기 안달루시아
그 중에서도 세비야 미스테솔 거리 74번지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이야기하려면 좀 길지
오랫동안 너를 보지 못했지
수많은 밤이 흘러갔지
그러나 밤은 테이블일 뿐
긴 밤은 조금 더 긴 테이블일 뿐
너와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긴 밤을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져 있을 뿐
결국은 하나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있네
그 사실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잠들 때뿐
나에겐 잠이 필요해
너에게도 잠이 필요해


낮잠시간이 주어지는 스페인의 사람들은 밤늦도록 활발히 움직이니까 화자 홀로 깨어 있는 듯한 시 속의 시간은 새벽 세 시쯤일 터.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이야기하려면 좀 길’단다. 오래도록 떠돌다 마음 내려놓은 ‘여기’도 화자의 타향. 집밖에 나와 앉아 화자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았을 테다.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밤의 하늘, 망망히 펼쳐지는 검게 반들거리는 하늘. 그리움과 외로움이 화자의 가슴에 시리게 번진다. ‘오랫동안 너를 보지 못했지/수많은 밤이 흘러갔지’, 이토록 그리운 사람을 무슨 사연으로 화자는 떠나온 것일까. ‘그러나 밤은 테이블일 뿐/긴 밤은 조금 더 긴 테이블일 뿐’, 화자는 밤하늘을 별이 흩뿌려진 아름다운 테이블이라 상상한다. 그러자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금 한 하늘 아래 존재하는 ‘너와 나는’ ‘조금 떨어져 있을 뿐/결국은 하나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있네’. 화자에게 위안을 주는 이 실감은 그러나 잠이 들락 말락 할 때뿐, 정신이 말짱할 때는 너무나 외롭고 그립다. 화자는 자주 잠 못 이루고, ‘아주 긴 밤을 사이에 두고’ 있는 ‘너’도 마찬가지라는 걸 안다.

이 시는 윤고은 외 여섯 작가가 일곱 도시, 세비야 아비뇽 뉴욕 도쿄 브장송 로스앤젤레스 튀니스를 배경으로 쓴 단편을 묶은 매혹적인 소설책 ‘도시와 나’에서 옮겼다. 윤고은의 ‘콜럼버스의 뼈’는 주인공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주소를 들고 그 집을 찾으려 세비야의 미로를 헤매는 이야기다. ‘미스테솔 거리 74번지’, 주소도 참 시적이다. 그 뜻을 맞혀 보려 인터넷을 검색했다. 솔은 스페인어 ‘Sol(태양)’일 텐데 ‘Soledad(고독)’가 느껴진다. 소설을 읽으면 이 시에 담긴 페이소스를 더 절묘하게 맛볼 수 있다.

황인숙 시인
#밤의 아주 긴 테이블#윤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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