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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9>어떤 의사의 어머니

입력 2012-10-16 03:00업데이트 2012-10-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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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지난여름 서울 서초동에 있는 신현호 변호사 사무실에 잘 차려입은 80대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가 앞세운 중년의 남자는 큰 병원 부원장 이름이 적힌 명함을 변호사에게 건넸다. 어리둥절해하는 신 변호사에게 할머니는 사전의료의향서(예전에는 생전유언 또는 존엄사 선언서, 사전의료지시서 등으로 불려 왔다)를 내밀며 공증을 요구했다. 머쓱한 표정의 의사 아들을 가리키며 “우리 아들이 보는 앞에서 내 뜻을 확인받고 싶다”고 말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두렵다”

할머니는 자신의 동생이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저렇게는 안 산다.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라고 되뇌어 왔는데 집안에서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자신이 병들었을 때 현대 의학이 더는 회복시킬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냥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도록 해달라는 뜻을 밝혀 두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될 것 같지 않고 가족이 무조건 자신에게 연명치료를 해 줄까 봐 겁난다는 하소연이었다. 의사인 아들조차 어미의 그런 소망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부모 생각한다고 여차하면 자신에게 심폐소생술도 하고 인공호흡기도 들이대면 그때 무슨 수가 있겠느냐, 그러니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 이렇게 확실하게 미리 공증을 받아 놓겠다는 게 할머니의 뜻이었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일부러 공증을 받지 않아도 지정된 요건에 맞게 작성되면 말기 환자의 뜻이 관련법(암 관리법)에 따라 존중된다. 그런데도 그 할머니가 구태여 공증을 요청하는 건 나중에 그 서류가 위조됐느니 안 됐느니 하며 가족 구성원 간에 말다툼이 생길 여지를 미리 차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 변호사는 이런 상황에 자주 마주친다. 사전의료의향서 공증을 받아 놓으려는 보통 사람들의 심리는 자신이 편안히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을 가족이 지켜줄지 미덥지가 않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이 나온 2009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신 변호사는 이 판결을 끌어 낸 세브란스병원 김모 할머니 가족 측의 특별대리인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

이보다 훨씬 앞선 15년 전에는 소극적 안락사 논쟁으로 확대된 서울 보라매병원 사건에도 관여했었다. 존엄사와 안락사 다툼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가족 측이 ‘환자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니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주장하고 병원 측은 ‘마지막까지 치료해야 한다’고 반박하는 의료 현장에서 그는 법리를 논할 때 죽음의 존엄에 가치를 두고 변호한다.





“뇌성마비로 생존 자체가 어려운 1개월 된 아기가 있었습니다. 여러 합병증도 발생해서 연명치료를 중단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사건으로 커졌지요. 그 병원의 의료진은 아기가 살아 있는 한 계속 치료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갓난아기에게 사전의료의향서나 죽음에 관한 의사표현 같은 게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의료진과 가족 간 회의에 나도 참석했는데 아기 아빠가 말했어요. ‘이 중에서 누군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저런 식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저런 식의 연명치료를 계속해야 합니까? 여러분 아기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런 상태에서 그래도 연명치료 하겠어요?’” 하고 거꾸로 질문했습니다.

“그때 아기 엄마는 뭐라고 했어요?” 신 변호사에게 내가 물었을 때 “회의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너무나 울어서 가족이 다 말렸어요. 아기 엄마 대신 고모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엄마보단 냉정한 모습을 보였지요”라고 설명했다.

병원 측이 그 아기의 치료를 종결했는지 여부를 신 변호사는 밝히지 않았다. 나 자신도 그 결과를 알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 냈다. 그와 나는 잠시 침묵으로 결과를 이야기하지 않는 데 동의한 셈이다. 아기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우리가 묻거나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내가 저 경우라면 하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가족 편에서 혹은 병원 편에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가족 편에 선다 하더라도 엄마와 아빠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생각의 훈련이 필요한 시대

최철주 칼럼니스트최철주 칼럼니스트
또 앞서 이야기한 할머니의 사례도 어느 가정에서나 맞닥뜨릴 수 있는 일이다. 큰 병원의 부원장까지 하고 있는 의사 아들을 앞세우고 나타난 그가 공증까지 요구한 상황에서 독자들은 누구 손을 들어줄까. 할머니 쪽인가 아니면 마지못해 따라온 아들 쪽인가. 내가 그의 아들딸이라면 어떻게 부모와 대화를 나눌 것인가. 모두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될 어느 날에 대비하기 위해 이처럼 생각의 훈련이 필요해진 시대다. 우리 모두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과 존엄, 생명 윤리는 그 사건이 내 문제냐 제3자의 문제냐에 따라 답변이 엉뚱해질 수 있다. 죽음에 얽힌 우리 생각은 인간의 본성을 감추기도 한다. 어느 때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문제에 매우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막상 죽음 앞에서 처절하게 떠나는 모습을 우리는 적잖게 목격했다. 단지 우리는 그들의 일그러진 마지막 인생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최철주 칼럼니스트 choicj114@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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