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뫼비우스의 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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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들엔 자주 교회가 숨어 있습니다. 그림 속의 교회에 시선을 두다 보면 마음 둘 곳 없었던 고흐를 느낍니다. 그러니까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던 ‘별이 빛나는 밤’은 구원을 향한 기원이었던 겁니다. 고흐의 그림처럼 기분 좋은 꿈을 꾸게 하지는 않지만 김기덕의 영화도 구원을 향한 기원이라 믿습니다. 다만 김기덕의 영화는 악몽 속의 구원인 거지요.

90분 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영화, ‘뫼비우스’를 보셨습니까?

‘가족’이 주제인데도 가족과는 절대로 같이 보고 싶지 않은 영화, 뫼비우스를 보면서 내내 불편했습니다. 장면 장면이 바뀔 때마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칼부림이 일어납니다. 남편은 아내를 닮은 여자와 외도를 하고,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떠는 아내는 메두사가 되어 아들을 잡아먹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악을 쓰고 할퀴고 찌르면서 상처를 내는 그곳이 김기덕이 생각하는 가족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늘 부모의 주술에 걸리지 않나요? 엄마의 저주를 몸에 새기고 사는 아들이 어떻게 엄마를 벗어나 건강한 삶을 일굴 수 있겠습니까? 김기덕은 바로 그 자리, 사랑한다면서 미워하고, 욕망에 사로 잡혀 서로 만신창이를 만드는 가족이 바로 우리 삶의 출발점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전혀 구원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콩가루 집안을 선택한 것은 가족의 본질을 날것으로 보여주겠다는 의지겠지요. 그래서 그는 대사까지 지웁니다. 관객이 이미지에 집중하도록 말입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가족도 공허하거나 뒤틀려 있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뫼비우스 띠는 안팎이 없지요?

아내에게 충실하지 않은 남편과 남편에게 좌절한 아내, 남편에게 분노해서 남편 대신 아들의 남성성을 거세한 아내와 아내 대신 아들에게 속죄하는 아버지, 아들을 잡아먹는 어머니와 어머니를 욕망하는 아들은 안팎이 없습니다. 그것이 안팎이 없는 건 그것이 바로 동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욕망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욕망은 도덕도, 반도덕도 아닙니다.

그런데 욕망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이 있는 곳엔 쾌락이 있습니다. 쾌락이 있는 곳엔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는 곳엔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뫼비우스의 띠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열화와 같은 지옥으로 만드는 그 욕망은 구원의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뫼비우스’에서 남편을 찌르고 아들을 거세하는 아내의 칼이 불상의 머리 밑에서 나오고, 욕망의 춤이 끝난 자리에서 아들이 경배를 올리는 것은 욕망과 구원이, 격정과 기원이, 천국과 지옥이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원은 욕망이 끊어진 자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은 끊으려 할수록 나를 휘감아 옥죄는 올무일 테니까요. 오히려 구원은 욕망을 인정하고 응시하고 돌보는 자리에서 생기는 것이겠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서로 갈 길을 터준다는데 자신이 추는 욕망의 춤을 응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뫼비우스#가족#구원#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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