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의 남자이야기]<53>분노를 걸어두는 나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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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알고 보면 매우 계산적인 놈이다. 터질 것 같은 분노라도 급한 와중에 약한 상대만을 골라 희생양 삼기 때문이다. 분노는 교활한 놈이기도 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빠르게 전염돼 관계를 병들게 한다.

남자의 분노는 상사에게 당한 모욕에서 시동을 걸었다. 후배들 앞에서 당했기에 더욱 수치스러웠다. 그는 분노의 용광로에 아낌없이 연료를 투입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를 향해 분풀이를 해댔다. 아내로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지만, 어쨌거나 이제 분노는 아내에게 달라붙었다.

아내는 제 방에서 게임을 하던 아들을 불러내어 털기 시작했다. 아들이 옷을 아무 데나 벗어놓은 것을 빌미 삼아 그동안 부렸던 말썽을 싸잡아 혼냈고, 결국에는 언제나처럼 아내 자신의 신세한탄으로 이어졌다.

“시끄럽다”면서 남자가 신경질을 부리는 것으로 부부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그 사이에 아들은 자기 방의 문을 걸어 잠근 채, 터질 것 같은 분노를 누구에게 전가해야 할지 벼르고 있었다.

남자가 발산했던 분노의 대가는 하루 만에 그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아들 녀석이 PC방에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다가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말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남자는 득달같이 집으로 달려와 아내에게 그것을 쏟아 부었다. 아내는 곧바로 아들을 불러내 분풀이를 시작했다. 이제 아들은 또 다른 곳에서 약한 아이를 찾아 분노를 발산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사실, 이런 악순환의 스타트를 끊는 것은 대부분 남자 자신이었다. 밖에서 발생한 분노를 집 안으로 실어 나르는 장본인이다. 많은 가정에서 남자들이 부지불식간에 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스스로 해소하지 못하고 죄 없는 식구들에게 폭탄으로 던져버리는 셈이다.

중국의 수필가 무무(木木)가 쓴 ‘오늘, 뺄셈’이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동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하루 일과를 망쳐버린 배관공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문 앞의 나무에 손을 문지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태워다준 사람이 이유를 묻자 배관공이 이렇게 대답한다.

“이 나무는 스트레스를 걸어두는 나무입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마음속에 짜증이 쌓일 때가 많아요. 하지만 그런 짜증을 집 안에 가지고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죠. 집 안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늘 이 나무에 걸어놓고 들어간답니다.”

배관공의 대답에서 백미는 다음과 같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걸어두었던 짜증이 다음 날 아침에 일을 나가려고 찾아보면 그 사이에 이미 사라지고 없더라는 사실이죠.”

한상복 작가
#분노#모욕#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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