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의 남자이야기]<39>우는 남자 전성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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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생리는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일 잘하고 올곧은 선배들은 일찌감치 짐을 싼다. 그런 선배들이 떠난 자리에 남는 것은 ‘해바라기’들뿐이다.

남자는 지난달부터 출근한 두 번째 직장에서 ‘해바라기의 끝판왕’을 만났다. 사내 비호감 1위라는 팀장이 그랬다. 윗분이 한마디 하면 아랫사람들에게 백 마디로 부풀려 다그치기 일쑤였다.

팀장의 주특기는 ‘눈물’이었다. 수년 전 자신의 승진을 확신한 나머지, 선배를 공공연하게 무시했다가, 그 선배가 발탁되는 바람에 위기에 몰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위기를 눈물 연기로 돌파, 승승장구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게 팀원들의 해설이었다. 울면서 하소연한 게 먹혀들어 갔는지, 그때부터 두 사람이 찰떡궁합처럼 붙었다는 것.

남자는 반신반의했다. 며칠 전에도 아내의 출산 때문에 휴가를 신청한 팀원에게 신경질을 부리던 팀장이었다. 그토록 인정머리 없는 사람에게 눈물이라는 이미지가 좀처럼 짝지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팀장의 신들린 눈물 연기를 직접 확인할 기회가 마침내 오고 말았다. 팀 회식 자리였다. ‘찰떡궁합’ 본부장이 격려차 참석했으며, 그에 대한 팀장의 용비어천가와 단심가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종묘제례악에 흥이 오른 본부장이 노하우라도 공개하듯 왕년의 고생담을 한 보따리 풀어놓았다. 간부라면 누구나 겪었을, 뻔한 스토리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팀장이었다.

“본부장님,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제가 보필을 제대로 못해서 이렇게…. 엉∼ 죄송합니다.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엉엉∼.”

훌쩍임으로 장단을 맞추다가 감정에 복받쳤는지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본부장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팀원들은 목불인견의 사태에 고개를 황급히 숙여야만 했다.

남자는 몇몇 팀원과 포장마차에서 따로 2차를 마친 뒤 심야버스에 올랐다. 팀장의 눈물이 자꾸 눈에 밟혔다. 드라마의 주인공만은 못했지만 진심을 보여주는 듯한 탁월한 눈물 연기였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출세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일까.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사내란 일생에 세 번만 우는 존재라고 했는데.

이제는 세상이 개벽해 우는 남자 전성시대인 모양이다. TV만 켜면 남자 주인공이 멋지게 눈물을 흘린다. 대선후보도 울고 4성 장군도 울먹인다. 하물며 작은 회사의 일개 팀장이야.

공감 코드일까, 아니면 세상살이가 힘들어졌기 때문일까. 직장에서 최후까지 버티려면 비루함 정도는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남자를 슬프게 했다. 정말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상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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