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하정민]무민세대의 힐링, ASMR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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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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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이런 걸 좋아하게 될 줄 몰랐어.”

사탕을 쪽쪽 빤 후 깨물어 먹는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동영상에 빠졌다는 지인 A 씨(44). ASMR의 인기야 익히 알았지만 2030세대도 아니고 주변의 40대가 사탕 소리를 즐긴다니 깜짝 놀랐다. 주책이라고 핀잔을 주자 나름 진지한 답이 돌아왔다.

“동영상을 틀어놓고 멍 때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게임 방송처럼 집중해서 볼 필요도 없고. 일종의 디지털 명상이랄까….”

ASMR는 쉽게 말해 심리적 쾌감과 안정감을 주는 소리에 대한 반응이다. 특정 소리가 일종의 방아쇠로 작용해 기분 좋은 자극(팅글·tingle)을 느끼게 한다. ASMR에 낯선 이는 바람, 비, 파도 같은 자연음을 먼저 떠올리나 실제 인기를 끄는 콘텐츠는 모두 인위적 소리로 팅글을 유도한다. 음식 먹기, 글씨 쓰기, 액체괴물 슬라임 만지기, 귀지 파기, 면도, 애완동물 관찰, 애인처럼 달콤한 말 속삭이기 등이다.

출처=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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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장난 같다’ ‘선정적이다’는 혹평도 있지만 누가 뭐래도 ASMR는 대세. 디지털 광고업체 인크로스는 지난해 9월부터 1년간 국내 동영상의 종류별 조회수를 분석했다. ASMR는 유튜브에서 총 3210만 조회로 ‘노래나 춤 따라하기’(커버·8198만 회)에 이어 2위에 올랐다. 흔히 떠올리는 먹방, 뷰티, 게임을 다 제쳤다.

왜 그럴까. 우선 특유의 무(無)의미, 무목적성을 들 수 있다. A 씨는 말한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광고 있지? 그걸 동영상으로 옮긴 게 ASMR야.” 더 예뻐지고, 더 유명해지고, 더 많은 돈을 벌라고 은연중 압박하는 다른 콘텐츠와 달리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 좋다고 했다.

만드는 사람이 보는 사람보다 더 위안을 느낀다는 점도 있다. ASMR 유튜버의 원조 격인 러시아계 미국인 마리아 빅토로프나(32). 2011년부터 150만 구독자를 보유한 ‘젠틀 위스퍼링’ 채널을 운영하는 그는 19세에 이민을 왔다. 미국에 오자마자 부모는 이혼했고 말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는 어느 날 유튜브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어와 영어로 속삭이는 모습에 큰 위안을 얻었다. 의료용품 매장 직원이란 생업을 때려치우고 유튜버로 나섰다. 국내 인기 유튜버 미니유(본명 유민정·29)도 마찬가지. 고단한 취업준비생으로 지내다 ASMR의 위로에 빠져 이제 47만 명에게 이를 돌려주고 있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일각에서는 ASMR 애청자를 ‘무민세대의 표본’으로 부른다. ‘없을 무(無)’에 ‘의미하다(mean)’는 영어를 결합한 신조어로 극심한 경쟁과 피로에 지친 이들이 무자극, 무맥락 콘텐츠에 빠진다는 뜻이다. 혹자는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사탕 빨고 귀지 파는 소리나 듣냐”지만 오죽하면 그런 소리에서라도 위안을 찾는지를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ASMR는 모두가 각자의 무간지옥에서 신음하는 이 시대가 낳은 돌연변이인지도 모른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차장 dew@donga.com
#asmr#무민세대#유튜브#자율감각 쾌락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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