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선희]오후 8시에 막이 오르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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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문화부 기자
박선희 문화부 기자
국내에서 올라가는 공연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그중 하나가 평일 저녁 공연은 오후 8시에 시작한다는 것이다. 뮤지컬, 연극, 무용 등 분야를 막론하고 예외가 드물다. 관람 시간이 인터미션(막간 휴식 시간)을 포함해 3시간 이상인 경우엔 오후 11시가 넘어서야 공연이 끝난다. 일부 관객은 자정을 지나 날짜가 바뀐 뒤 집에 도착하기도 한다.

귀가까지 감안하면 확실히 부담스러운 시간대다. 그런데도 약속이나 한 듯 오후 8시를 고수하는 이유가 뭘까. 관계자들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공연 시작 시간이 오후 7시 반인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각하는 관객들이 골칫거리였다. 평일 저녁 ‘칼퇴근’을 하고 여유 있게 도착하는 관객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공연 진행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도착할 시간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오후 8시로 늦춰졌단 설명이다.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선 주로 월요일 공연을 쉬고 평일 낮 공연은 거의 운영하지 않는다. 찾는 관객이 없기 때문이다. 티켓 가격이 최대 15만 원까지 하는 공연장의 주 관객은 소득이 있고 문화생활 욕구가 있는 성인 직장인들이다. 그런데 각종 회의와 주간 일정으로 심리적 물리적으로 가장 고단한 날이 월요일이니 관객이 적을 수밖에 없다. 평일 낮 시간을 빼기는 더 어렵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일부러 월요일 공연을 시도한 곳도 있었지만 신통치 않았다”며 “평일 낮 공연 역시 연휴나 휴가철에 한해 예외적으로 운영한다”고 말했다.

재밌는 건 이것이 무척 ‘한국적’인 현상이란 점이다.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나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는 극장마다 평일 오후 2∼3시 공연이 마련돼 있다. 저녁 공연 역시 오후 7시에서 7시 반 사이에 시작한다. 휴무도 극장에 따라 제각각이라 미리 확인해야 한다. 관광객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도시 모두 자율출퇴근제 등 근무 형태 유연화가 정착됐단 공통점이 있다. 모든 관객이 ‘올빼미족’이 될 필요가 없단 뜻이다. 일본만 해도 공연 시간이 우리보다 빠르고 다양하다. 다양한 시간대 공연을 선택할 수 있는 이들이 더 많다는 뜻이다.

보다 많은 이들이 접근하기 좋은 시간에 다양한 공연이 올라가야 관객층이 늘어나고 문화산업도 살아난다. 요즘 공연업계에도 ‘주 52시간 근무’ 시행이 긍정적 영향을 미칠 거란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실제 공연산업 부흥으로 이어지려면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하는 수준 이상의 근로문화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이제 막 ‘정시 퇴근 준수’로 첫발을 떼는 수준이지만, 언젠가 오후 7시 공연도 관객으로 가득 차는 서울의 풍경을 기대해 본다.
 
박선희 문화부 기자 teller@donga.com
#공연#공연 시간#주 52시간 근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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