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전승민]서울 출장 온 과학자, 편의점에 꼭 들르는 까닭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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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민 동아사이언스 수석기자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수석기자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근무하는 한 과학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그는 서울로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출장 후 결재서류를 꾸미다 난감한 일을 겪었다. 깜박 잊고 편의점에 들르지 않은 것이다. 규정상 출장을 다녀왔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기 위해선 ‘서울에서 돈을 썼다’는 영수증을 내곤 한다. 돈 쓸 일이 없어도 편의점 등에서 음료수 하나 정도를 사 먹는 식이다. 그런데 그날은 서울역 회의실에서 외부기관 사람들과 회의만 진행하고 그대로 대전으로 돌아왔다. 이 과학자는 결국 정말로 서울에서 회의가 열린 것이 맞는지, 자신이 참석한 것은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근거서류를 만들어 제출했다. 그는 “음료수 값 몇천 원이 문제가 아니라, 이게 도대체 뭐하는 일인지 회의가 든다”고 했다.

국내 과학기술계를 취재하다 보면 이런 어이없는 행정처리 때문에 곤욕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또 다른 과학자는 “여러 해외 과학자를 만나러 학회에 참석하려는데, 결재를 받으려고 하자 각 프로그램의 책임자 이름을 써서 내라고 했다”면서 “참가할 모든 세션의 책임자를 확인하기 위해 한 시간 이상 검색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연구비로 물품 등을 살 때도 행정적 절차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긴 한 과학자는 “전(기업)에는 원하는 물품을 산 다음 영수증만 제출하면 됐다”면서 “여기(대학)에선 조달청 구매조건에 맞춰 제품 품목 등록, 관세분류번호, 정부물품 분류번호, 식별번호 등을 모두 찾아 서류를 꾸며야 하고, 거기에 맞춰 외부업체에서 견적서를 받아야 총무부서에 구매 요청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이공계 대학교수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행정처리에 시간을 빼앗겨 연구는 하나도 하지 못하고 퇴근하는 날이 많다”면서 “업무효율은 둘째 치고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정부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해외출장을 갔다가 주변 국가로 외유를 다녀오는 등, 과거 몇몇 과학자들의 올바르지 못한 사례가 발견되면서 시스템을 짤 때 의혹의 눈초리가 커졌을 것이다. 결국 매사에 증빙부터 요구하는 문화가 생기고, 과학자들의 불만도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유럽 등지로 해외출장을 가면 버스나 열차를 탈 때 탑승권 검사를 아예 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무임승차가 많을 것 같아 직원에게 물어보니 “표를 사지 않았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큰 벌금을 물어야 한다”면서 “이 방식이 행정적으로도 편하고 운영비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시민을 믿고 맡기면서 편리성은 높이되, 비리가 발견되면 엄벌해 자정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적폐(積弊)란 오랜 기간 쌓여온 폐단을 뜻한다. 이처럼 업무효율을 떨어뜨리는 행정처리 방식은 이미 과학계의 대표적 적폐가 됐다. 현실적으로 완벽한 제도란 존재할 수 없는 일. 모든 시스템은 ‘무엇을 우선시할까’를 항상 고민해야 한다. 국가의 발전을 책임지는 과학자라면, 최소한 그 인격에 대한 신뢰만큼은 반드시 우선시해야 하지 않을까.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수석기자 enhanced@donga.com
#과학계 적폐#행정처리#영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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