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반칠환]마법을 배워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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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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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죽기 전에, 마법을 배우고 싶다. 고도의 심리적, 과학적 장치를 활용한 TV쇼에 나오는 마술이 아니라 진짜 마법을 배우고 싶다. 마법을 배우고 나면 내 유년으로 초대장을 보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어떤 손님들’을 초대할 것이다. ‘어떤 개구리들’과 ‘어떤 사슴벌레들’과 ‘어떤 풍뎅이들’과 ‘어떤 잠자리들’과 ‘어떤 뱀들’을 초대할 것이다. 눈치 빠른 이들은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어떤 조무래기’ 때문에 ‘죽기 전에 무언가를’ 다 못 하고 사라진 친구들이다. 느닷없이 봇도랑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팔다리를 떼인 채 생물 선풍기로 윙윙거리다가, 불붙은 밀짚을 꽁무니에 달고 시집을 가다가, 마당귀에서 구불구불 마지막 편지를 쓰다가 사라졌던 친구들이다. 또 어떤 쌀가마니들과 어떤 국그릇들을 초대할 것이다. 평생 뜨거운 밥이 되었던 그들을 만나볼 것이다. 모두 모이면 섣불리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못 할 것이다. 그저 우물거리는 내 입술을 보자마자 개구리는 개굴, 사슴벌레는 사슴, 풍뎅이는 풍뎅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눈짓으로 물어볼 것이다.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어쩌면 마법을 배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 아침을 한 공기의 밥과 멸치 볶음으로 시작한다고 치자. 밥이 된 볍씨들이 방앗간에서 도정되기 전 저마다 꿈이 있었을 것이다. 명년 봄을 기다리며 설레었을 것이다. 찰랑찰랑 물결 이는 논에서 싹을 틔워 칼날처럼 푸른 잎을 뻗고 싶었을 것이다. 벼 포기 사이로 헤적헤적 거니는 백로와 키를 재보거나 맹금류를 피해 꽥꽥 숨어드는 오리새끼들을 품어 주고도 싶었을 것이다. 메뚜기를 어깨에 얹거나, 아침 이슬 반짝이는 거미줄을 두르고도 싶었을 것이다. 가을이 오면 마음껏 황금물결 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천의 낟알들이 그 꿈 다 놓고 내게로 와서 뜨거운 밥이 되었다. 종지 속 꿈틀꿈틀 생의 마지막 동작으로 ‘얼음’이 된 멸치조림들도 저마다 창창한 꿈이 있었을 것이다. 푸른 대해를 헤엄치며 아름다운 수초 흔들리는 바다 속 절경을 유람하고, 물 천장으로 굴절되는 별빛을 헤아리다가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 별처럼 많은 새끼를 낳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부의 그물이 내려왔을 때 모두 ‘열 일 제치고’ 그의 생계를 위해 고깃배로 올라왔다. 멸치들이 ‘죽기 전에 이것만은 하고 싶었던 일’들은 무얼까? 영원히 인터뷰할 수는 없지만, 알 것도 같다.

겨울철 얼음장 밑 물고기들을 보면 털실로 스웨터를 떠 입히고 싶다. 물갈퀴 쩍쩍 달라붙는 얼음 위를 걷는 물오리들을 보면 털신을 신기고 싶다. 종일 외다리로 서서 사냥하는 왜가리를 보면 나무젓가락으로 목발을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 누천 년 다스리지 못한 분노로 온 세상 세간을 부수다가 나뭇가지와 절벽에 머리채를 뜯기는 태풍에게는 예쁜 머리띠를 하나 선물하고 싶다. 수십 년째 사막 친정 찾지 않는 비구름 색시에게 유능한 심리 상담사를 소개시켜 주거나 최신형 내비게이션을 선물하고도 싶다. 이 계획을 누군가에게 누설하자 그가 한심한 듯 말했다. ‘얘, 물고기는 스웨터 없이 잘도 겨울 나고, 왜가리는 물고기 잡으면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날아가고, 태풍은 이미 햇볕 애인이 선물한 무지개 머리띠가 있고, 비구름 색시는 이미 눈물로 뉘우치고 있단다.’ 하지만 주지 못 하는 선물의 목록을 나는 틈만 나면 수첩에 적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죽기 전에 이것도’ 못 해 보고, ‘열 일 제치고’ 내게 온 것들로 가득하다. 세상엔 한 생명이 태어나 꼭 하고 가야만 할 일이 따로 있을까? 무엇을 하든 지금 오늘에 감사하며 하루를 누리다가, 구름 손짓하면 언제라도 너머로 달려가고 싶다. 어떤 이들은 불멸을 꿈꾸지만, 나는 소멸을 꿈꾼다. 수만 마리 철새가 창공을 어지럽게 날아도 하늘은 비어 있고, 수억 마리 물고기가 바다를 가르고 헤엄쳐도 바다에는 길이 없다. 어떤 위인이 생애에 미처 하지 못 하고 간 일 때문에 태양이 외롭거나, 바다가 쓸쓸한 적은 없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일들을 하고 간 위인들 때문에 산이 아프고, 강이 아프고, 바다가 아프고, 미래가 아프다. 열 일 제치고 내게 온 친구들아, 언젠가 열 일 제치고 너희들에게 갈 것이다. 누구라도 삶은 느닷없이 왔다가 느닷없이 가는 것이지만, 세계는 내가 있어서 구족했던 것처럼 내가 없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반칠환 시인·숲생태전문가
#반칠환#마법#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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