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장유정]가족에게 긴 여행으로 보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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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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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지난 금요일에 네 살배기 아들의 참관 수업이 있었다. 햇살 가득한 화창한 날씨가 웅크린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날이었다. 수업을 핑계로 오후 일정도 비워놨겠다, 오랜만에 세 가족이 다 같이 동물원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길을 나서니 차는 막히지, 배는 고프지, 아이는 곯아떨어져 일어날 줄 모르지, 도로에서 대책 없이 흘려보내는 허송세월에 슬슬 짜증이 났다. 밤에 있을 스태프 회의 시간까지 돌아올 것을 계산해보니 막상 놀 시간은 얼마 안 됐다. 결국 우리는 제 풀에 꺾이고 말았다. 남편은 저녁 먹고 출발하려 했던 시댁으로 곧장 운전대 방향을 틀었고, 나는 중간에 내려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의 제목은 ‘멜랑콜리아’였다. 덴마크 출신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신작으로 인간의 우울증과 지구의 종말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영화는 1,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여주인공 저스틴(커스트 던스트)이 고질적인 멜랑콜리(우울증)로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는 과정을 그리고, 2부는 언니 클레어(샬럿 갱스부르)가 지구로 다가오는 멜랑콜리아란 이름의 행성에 대해 느끼는 극도의 불안감을 그렸다. 영화를 본 뒤 처음 든 생각은 ‘제목 한번 기가 막히게 지었다’는 것. 저스틴의 마음의 병인 멜랑콜리와 클레어의 두려움인 행성 멜랑콜리아는 작품 전반에 걸쳐 교묘하게 얽혀 있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클레어가 지구의 안전을 철석같이 믿던 남편의 자살을 목격한 뒤 동생 저스틴에게 사랑하는 가족과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그림 같은 작별을 기대하는 클레어에게 저스틴은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말들을 늘어놓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클레어의 아들 리오를 데리고 나뭇가지로 만든 비밀 동굴로 들어간다. 눈을 감은 그들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행성을 의연하게 혹은 공포에 질린 채로 마주한다. 세상의 종말 앞에 선 두 자매의 서로 다른 반응은 내게 버킷리스트의 개념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버킷리스트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낭만적인 상상을 하곤 했다. 그동안 꿈만 꾸고 실천하지 못했던 일을 아무런 방해 없이 충분히 즐겨 볼 찬스라고 여겼다. 하지만 죽기 전이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무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루다 끝내 못해 볼 일이 아니라 죽기 직전이라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과연 뭘까?

직업상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시간을 편하게 쓸 수 있는 편인 데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하고 마는 성미라 남기고 싶은 게 있다든지 배워보고 싶은 게 있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미련은 없다. 다만 나의 자유를 보장해주려 희생했던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낯선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함께 안나푸르나의 깊고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고 싶고, 모로코의 이국적이고 활기 넘치는 시장을 구경하고 싶고,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늘 동경의 대상이었던 쿠바의 거리를 걷고 싶다. 여행이 살아서 떠나는 윤회라고 치자면, 죽음 역시 일종의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늘 혼자 길을 나섰던 이유는 침묵과 사색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찾고 싶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과 떠나는 여행은 전에는 결코 몰랐던, 차마 기대하지 못했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남편이 되기 전 처음 그의 눈빛이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설렘, 막 태어난 아들을 안았을 때 느꼈던 감격, 우리 부모님도 이제 늙으셨구나 깨달았을 때의 서글픔. 손끝을 베인 것처럼 생생했던 감정들도 어느새 시간이 지나고 나니 옅어졌다. 나는 충분히 이기적이었고 핑계거리도 많았기 때문에 망각의 속도도 남들보다 배는 빨랐다. 가끔은 사라진 감정과 지리멸렬한 일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사랑은 없어지거나 희석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적응된 것이었다. 마치 공기처럼 온도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늘 그곳에 있는 것들의 존재를 잊듯 말이다.

더 늦기 전에 쿠바행 비행기를 끊어야겠다. 너무 멀다면 당장 제주도도 좋겠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공간에서 내 살처럼 편안한 사람들의 새삼스러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소중함을 잊고 산 시간들을 보상해주고 싶다. 차마 나누지 못했던 그 많은 이야기를 다하기에 남은 시간은 너무나 짧다.

장유정 뮤지컬 연출자·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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