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한준희]종이 아깝지 않을 축구 서적 한권 내고 싶다

  • Array
  • 입력 2012년 5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작고하신 주영광 선생님(1954년 스위스 월드컵 한국 대표)의 분데스리가 해설을 감명 깊게 듣던 유년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나 역시 축구해설가로 마이크 앞에 선 지 벌써 10년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즐긴 평생의 취미가 직업이 됐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물론 그동안 보람 있는 일도 적지 않았다. 특히 2005년 KBS 방송국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초중고, 대학 축구를 비롯해 실업 축구, 여자 축구에 이르는 각종 아마추어 대회들을 꽤나 많이 중계했다. 우리 풀뿌리 축구의 홍보에 조금의 힘이라도 보탠 듯하여 나름의 뿌듯함을 갖고 있다. 또한 ‘비바! K리그’ 프로그램에서 경기 화면 분석을 수행했던 것은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해설을 위해서도 매우 유익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중계와 방송들이 월드컵이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중계보다도 더 보람찬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에게는 그라운드 위에서 축구공과 함께 호흡하며 인생을 바친 이들의 경험이 결여돼 있다. 한마디로 이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으로서 영원히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런 이유로 예전부터 선수 출신이 아닌 해설가의 역할과 임무, 의무에 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축구에 관한 일로 이왕 마이크 앞에 섰다면 부족하나마 밥값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 경기라도 더 관찰하는 것, 공부와 연구, 분석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만이 선수 출신이 아닌 해설가의 의무이자 최우선의 덕목이라 여겨왔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이 땅에는 세계 축구가 돌아가는 동향에 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켜기만 하면 하루에도 수백 개 해외 축구 관련 기사가 넘쳐난다. 초등학생들이 프리미어리그 스무 개 클럽 주전 멤버들을 외우고 다니는 요즘이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는 공부와 분석은 선수 출신 아닌 축구해설가가 충족시켜야 할 그야말로 최소한의 존재 요건인 셈이다.

여러 해 전부터 나의 공부 대상은 세계 축구의 역사적, 전술적 흐름에 관한 것이었다. 한동안 온라인에 연재했던 ‘세계 축구사 최고의 팀’ 시리즈, ‘축구사의 아쉬운 2인자 팀’ 시리즈도 아직은 턱없이 부족한 이 공부의 산물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내가 세상을 뜨기 전 꼭 해보고 싶은 것 한 가지를 밝힌다면, 그것은 클럽과 국가대표를 막론하고 ‘세계 축구사의 유의미한 강호 100팀’을 선정해 그들의 전술과 스타일, 감독과 선수들을 세심하게 고찰한 축구 서적 한 권을 펴내는 일이다.

사실 축구 서적과 관련해 그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출판 이야기가 오간 출판사가 여럿 있었고, 두 군데와는 약간의 기초적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 작업들은 꾸준히 지속되지 못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당시의 담당자들께 다시금 송구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당시의 작업들은 정말로 펴내고 싶은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척박한 이 땅의 축구 서적 현실에서 상품성, 시의성과 전혀 무관한 집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아직까지 우리의 축구 서적들은 대부분 월드컵, 프리미어리그 관련 서적 아니면 유명인들의 자서전류와 기술교본들에 한정돼 있다. ‘월드컵 특수’와 무관한 시점에 축구 서적을 내놓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차치하고라도 내가 소망하는 ‘엄선된 100팀을 통한 세계 축구의 역사적, 전술적 고찰’은 필자의 부족한 능력에 비추어 자체로 짧지 않은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지금으로부터 15, 16년 전 하루가 멀다 않고 서점을 들락거렸던 시절, 서점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을 보며 내가 다짐한 것 한 가지는 “만약 내가 책을 쓰게 된다면, 적어도 인쇄된 종이가 아깝게 느껴질 책은 절대로 쓰지 말자”는 것이었다. 종이 아깝지 않은 두툼한 서적 한 권 남기고자 하는 것이 이 부족함 많은 축구해설가의 죽기 전 소망이다.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아주대 겸임교수
#한준희#축구 서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