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의 경제 프리즘]경상수지 흑자, 반드시 善은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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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잘되면 경상흑자 늘지만 총투자 줄어도 흑자 나기 마련
高성장기엔 투자율 높아 적자, 외환위기후 투자부진형 흑자로
돈 남아도는데 투자 안 하는 건 이 땅에선 돈 벌기 힘들다는 뜻
파티 멈추고 성장엔진 점검해야

허승호 논설위원
허승호 논설위원
세계 교역의 둔화에도 작년 11월까지 22개월째 경상수지 흑자 행진이 이어졌다. 올해는 세계 경기회복에 힘입어 수출이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엔화 약세라는 경고음도 있지만 일단 즐거운 파티 분위기다.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함의(含意)가 있다. ‘동전엔 양면이 있는 법’이라는 수사(修辭)적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경상수지 흑자란 상품 및 서비스의 수출이 수입보다 많다는 뜻이다. 흑자를 내려면 중국 등 주요 수출시장의 경기가 좋아 우리 제품에 대한 수요가 커지거나, 주력 수출상품의 대외 경쟁력이 높아져야 한다. 물론 후자 쪽이 바람직하다. 반면 우울한 흑자도 있다. 국내 경기가 안 좋아 수입이 확 줄면 수출이 시원찮아도 흑자가 난다. ‘불황형 흑자’다. 환율이 올라도(원화 평가절하) 수출은 늘어난다.

하지만 거시경제학은 훨씬 시계(視界)가 길고, 낯설며, ‘직관적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을 가르친다. 얘기는 ‘저축=국내투자+순해외투자’라는 항등식(恒等式)에서 시작된다. 순해외투자(± 부호를 바꾸면 자본수지라 부른다)는 경상수지와 항상 같은 값이다. 경로는 이렇다. 먼저 대부자금시장에서 저축과 국내 투자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순해외투자(경상수지)가 산출되며, 이 같은 경상수지를 발생시키는 수준에서 환율의 균형이 이뤄진다. 단기 파고(波高) 차원에서는 환율이 수출입을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장기 수위(水位)의 시야에서는 저축과 국내 투자가 경상수지와 환율을 좌우하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의 저축 성향이 워낙 높아 투자 이상의 저축을 하는 일본의 경우 해마다 순해외투자(해외 증권 및 부동산의 구입으로 나타난다)가 일어나며, 그 액수만큼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그에 맞게 엔화 환율이 정해진다. 물론 흑자가 누적되면 엔화가 절상되고 이는 수출기업에 큰 부담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축이 계속 국내 투자를 압도하면 경상흑자도 엔화 절상도 멈추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 고도성장하던 1970∼90년대 내내 순해외투자(경상수지)가 적자였다. 당시 총생산 대비 저축률이 40%나 됐지만 국내 투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고 차액을 메우기 위해 온갖 형태로 외자(外資)를 들여왔던 것이다. 워낙 투자가 왕성해 경상적자가 지속됐던 것.

반면 지금은 돈이 나간다. 저축률이 30% 수준으로 낮아졌으나 투자율은 더 떨어져 국내에 돈이 남아돌아서다. 국내 투자가 안 돼 경상흑자 기조로 돌아선 것이다. 1998년부터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무모한 투자’의 위험을 체감하면서 생긴 변화다.

투자를 덜 하는 이유는 뭘까. 돈이 없어서인가. ‘저축의 투자 초과’에서 보듯 돈은 많다. 단기 부동(浮動)자금도 700조 원이 넘는다. ‘투자의 비용’이라는 금리는 너무 낮은 수준이다. 질문에 대한 정답은 ‘돈 벌 만한 사업이 안 보여서’다. 기업은 돈 버는 집단이다.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자신이 있으면 누가 뭐래도 투자한다. 대통령이나 세상사가 맘에 안 들어 투자 안 하는 일은 절대 없다.

투자수익이 안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동력이 약화됐다는 뜻이다. 이른바 잠재성장률 하락이다. 돈엔 코가 없지만 ‘이윤의 냄새’를 맡는 후각만은 대단하다. 내자(內資)든 외자든 ‘여기서 돈 벌기 힘들다’는 판단이 서면 어느 샌가 국경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면 경상흑자가 시작된다.

일본 역시 심각한 투자 위축에 시달리고 있다. 1990년대 초엔 총생산 대비 투자율이 30%를 넘었으나 하락을 계속해 현재 20%에도 못 미친다. 기업의 투자수익성이 떨어져서다. 일본 내각부는 “‘잃어버린 20년’을 불러온 본질적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 보고 있다.(일본은 지금도 저축이 투자보다 많아 경상수지는 계속 흑자다)

이처럼 경상수지 흑자에 어두운 측면이 있다고 해서 “경상수지 적자로 가자”고 하면 안 된다. 외환위기 때 겪었듯 경상적자 누적은 나라를 결딴낼 수 있다. 무엇이 좋을까. 과거 한국의 적자나 일본의 흑자에서 보듯 적어도 국제수지의 문제에서는 우월한 그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적정한 외환보유액과 대외지불능력을 확보한 수준에서 장기균형을 이루는 것이 최적이다. 다만 멈추지 않는 경상흑자 행진을 지켜보면서 ‘성장엔진에 발생한 문제’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취지다. 흑자에 겨워 흥청망청 샴페인 마셔도 좋을 그런 한 해가 아니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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