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25.끝>지금은 철학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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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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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을 때 찾는 높은 봉우리처럼, 철학은 방향 잃은 삶의 안내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유독 꽃을 좋아하는 제자가 있다. 온갖 꽃이 피는 때가 오면 그녀는 정신이 없다. 카메라를 들고서 이곳저곳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연방 셔터를 눌러댄다. 선생이라고 나를 만나 길을 걸어갈 때도 카페 앞 화분에 놓인 꽃에 넋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무엇인가 몰입할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것, 팍팍하고 서러운 삶에서 이것만큼 위로가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날인가 물어보았다. “야. 너는 왜 그렇게 꽃을 좋아하니?”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냥, 아름답잖아요. 왜 그렇게 물어보신 거지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대답했다. “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야. 그렇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니.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거든. 모든 사람이 너만큼 꽃을 좋아하지는 않잖아. 그러니까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뭐, 이렇게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니. 너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철학은 ‘왜?’라는 의문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그렇지만 행복한 순간에 나의 제자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왜?’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그것은 괜한 딴죽을 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창 연애 중인 사람이 자신의 애인에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일까?”라고 물었다고 하자. 아마 상대방은 바로 정색하고 물을 것이다.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니?” 철학자를 사람들이 피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잘 지내고 있는데 항상 물어본다. 그러고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가학증 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당신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가요?” “왜 당신은 사랑한다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왜 당신은 가족을 사랑의 공동체라고 믿고 있나요?” “왜 당신은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나요?” “왜 당신은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믿고 있나요?” 등등.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무엇 하러 이런 쓸데없고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삶은 항상 뜻하는 대로 펼쳐지지는 않는 법이다. 행복이 어느 순간 잿빛 불행으로 바뀔 수 있다. 사랑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결혼이 숨통을 죄어오는 구속이 될 수도 있다. 은퇴했을 때 남은 가족으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인류 문명의 총아라고 생각했지만, 투기 자본과 환율 등의 문제로 나와 가족을 거리로 내몰 수도 있다. 우리를 보호해줄 것만 같던 국가가 아무런 명분도 없는 전쟁에 참여하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스스로 고민하게 된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기반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지금 서 있는 곳은 도대체 어떤 곳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행복이란, 사랑이란, 가족이란, 자본주의란, 그리고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곱씹게 된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지만, 모든 확실한 것이 붕괴되었을 때 우리의 고뇌를 대변하는 말이다.

아쉽게도 이 경우 ‘왜?’라는 질문은 만시지탄(晩時之歎)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그전에 우리는 미리 모든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어야만 했던 것 아닐까. 그렇지만 가장 늦은 때는 가장 이른 때이기도 한 법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철저하게 점검해보아야 할 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푸른 꿈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고, 가장 활기에 차 있어야 할 20, 30대는 취업과 고용 불안, 그로부터 야기되는 경제적 압박으로 시들고 있으며 40, 50대는 점점 빨라지는 은퇴시기로 임박한 노후에 공포감마저 갖고 있다. 어쩌면 우리 공동체가 지금 공동체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동체가 자신의 성원을 돌보지 않는다고 해도, 인간은 행복한 삶에 대한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어려운 삶을 겪어내는 와중에도 우리 이웃들이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 목말라 하는 것이다. 사회가 나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스스로를 돌보아야만 한다는 각성이라고나 할까. 역사를 되돌아보면 삶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위대한 철학자가 등장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철학이 필요한 때다. 이제 우리는 슬프지만 받아들이도록 하자.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깊은 산 오솔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걷던 것을 잠시 멈추고 주변에 보이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야 한다. 물론 얼마 전 문학, 사학, 철학을 조롱했던 어느 사회 지도층 인사처럼 누군가는 우리를 나무랄지도 모른다. 그냥 가던 길을 갈 일이지 무엇 하러 시간과 힘을 낭비하느냐고. 그렇지만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높은 봉우리에 오르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한 전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며, 당연히 지금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더 많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주어진 힘을 안배하면서 걸을 수만 있다면, 생각보다 산길도 그렇게 힘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철학의 힘이다. 얼핏 보면 삶의 정상적인 과정을 이탈해서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학은 ‘내가 나중에 알게 될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여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를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다 간 것은 아니다. 이제 다시 산에서 가던 길로 내려와 신발 끈을 묶고 여정을 힘차게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높은 봉우리에서 자신의 여정을 살펴보았던 사람은 그러지 않은 사람이 여정을 걷는 것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걸음은 지혜로울 것이며, 동시에 확고할 것이다. 언젠가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는 말했던 적이 있다. 이론과 실천은 두 다리와 같다고 말이다.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면 왼발이 따라가고, 왼발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발이 따라간다. 알게 되면 실천할 수 있게 되고, 실천하게 되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동양의 선현들이 가르치려고 했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진정한 의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행합일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은 마치 오른발과 왼발이 나란히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두 발이 나란히 있는 경우 우리는 조금도 걸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6개월간 현실이란 텍스트서 많은 것 배워 미숙한 가이드 포용해준 독자들에게 감사”▼

지금까지 나는 6개월 동안 24개의 테마를 통해 우리 삶의 다양한 풍경을 철학자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려고 애썼다. 매주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던 테마를 신중하게 선정하고 그 테마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봉우리로 독자들을 안내하려고 했다. 물론 어느 경우에는 문제를 내려다보는 데 적절하지 않은 낮은 봉우리로 독자를 안내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어느 경우에는 너무 높은 봉우리로 독자를 안내해서 문제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현기증만 유발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필자인 나의 책임이다. 능숙하지 않은 가이드를 따르느라 독자들은 얼마나 많이 고생했을까. 미안한 일이다. 그렇지만 많은 독자는 나의 무능력을 탓하기보다는 그래도 가이드가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너그럽게 포용해주었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연재가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독자들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지금 가까이에 있는 서점에 가면 더 멋지게 삶을 가이드해줄 수 있는 인문학 책들이 서가에서 여러분을 기다릴 테니까 말이다.

독자들에게 철학적 안목을 전해주려고 24번이나 봉우리를 오르느라, 사실 많이 지쳤다. 이제 조금 쉴 때가 된 것 같다. 매주 일요일 저녁 원고를 보내느라 주말도 반납할 수밖에 없었던 반년의 시간이 어느 사이엔가 흘러갔다. 다행스럽게도 그사이 원고가 중단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선생으로서 혹은 저자로서의 본분에 게을렀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잠시 쉬면서 그동안 쌓였던 미안함을 갚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꼭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이웃들의 고민을 숙고하느라 나는 대학원에서나 책에서 배울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동시에 현실이란 텍스트가 고전 텍스트보다 더 난해하고 심오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배웠고, 너무나 많은 것을 절감한 반년이었다. 그러니 우리 삶의 풍경을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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