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19>지진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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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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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절망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힘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사서(四書) 중의 하나로 전통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애독서였던 ‘중용(中庸)’이란 책에는 ‘하늘이 덮고 있고, 땅이 싣고 있는 곳(천지소복, 지지소재·天之所覆, 地之所載)’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곳은 바로 하늘과 땅 사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하늘은 인간이 우러러보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땅은 우리의 온갖 투정을 그대로 받아주는 어머니와 같은 푸근함을 상징한다. 하늘이 온갖 재앙을 내려도, 인간은 마지막으로 의지할 땅이 있기 때문에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서양의 경우도 동양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 기원전 8세기에 살았다고 하는 헤시오도스가 지은 ‘신통기(神統記·Theogony)’에 따르면 대지의 여신, 즉 가이아(Gaia)는 세상 모든 만물과 심지어 신들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그렇다! 대지는 바로 우리 인간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우리의 투정과 변덕을 너른 마음으로 품어주기 때문이다.

어머니란 인간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오는가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드라마틱하게 보낸다.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보면 ‘좌충우돌(左衝右突)’이나 ‘일희일비(一喜一悲)’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학교에서는 장난치다가 선생님에게 벌을 받기도 하고, 주변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집에 들어와서는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아버지에게 야단맞기 일쑤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결코 불안하거나 외롭지 않다. 그에게는 어떤 경우에든 따뜻하게 안아주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옳긴 옳은가 보다.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가 없었다면, 아마 아이들은 험난한 모험을 끝내고도 돌아가 쉴 곳이 없는 오디세우스와 같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마저 품어주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낸다면 과연 아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2011년 3월은 대재앙의 달, 믿었던 어머니가 아이에게 크게 화를 낸 달로 기억될 것이다. 규모 9.0의 강진과 그로부터 발생한 거대한 지진해일(쓰나미)이 일본 동북부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대지진은 직접적인 피해자인 일본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의 모든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재산이나 인명 손실이 가져다주는 충격 이상의 것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능을 자랑하던 국가 기구, 혹은 자연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과학자들도 대재앙에 속수무책이다.

신의 은총과 자비를 역설하던 종교단체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지금까지 그렇게 당당하게만 보였던 부모님마저도 대재앙 앞에서는 동요의 낯빛이 생생하기만 하다. 안전한 토대로만 여겨졌던 땅이 뒤흔들릴 때 인간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모든 확실성의 동요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대지진은 땅에 의지하고 살던 사람에게 안정감과 확실성을 빼앗아 가버린다. 바로 이것이 대지진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충격 중 가장 두려운 것 아닐까?

1755년 11월 1일 아침에도 인간은 역사적인 대지진으로 동요되었던 적이 있다. 대지진이 세 차례에 걸쳐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아프리카 서북부를 강타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리스본 대지진이었다. 볼테르(1694∼1778)의 글에는 당시 대지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팡글로스와 캉디드는 널빤지에 실려 해안에 닿을 수 있었다. 정신이 조금 들자 그들은 리스본을 향해 걸어갔다. 폭풍우를 피한 후에도 돈 몇 푼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 돈으로 밀려드는 허기를 면할 생각이었다. 도시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그들은 발밑에서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항구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바닷물이 솟아올라 정박 중인 배들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불꽃과 재가 회오리쳐 거리와 광장을 뒤덮었고 집들이 무너져 지붕이 거꾸로 뒤집혔으며 주춧돌은 흩어져 버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3만 명의 주민이 폐허 아래 깔렸다.
―‘캉디드(Candide)’

방금 읽은 부분은 팡글로스와 캉디드가 폭풍우를 만나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고생하던 대목에 이어서 등장하는 구절이다. 풍랑을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요가 없는 육지에 한시라도 빨리 발을 딛고 싶어 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설상가상이라고나 할까. 그들이 간신히 도착한 리스본은 폭풍우로 요동치는 바다와 다를 바가 없었다. 대지진이 리스본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리스본에서 음식을 사서 허기를 면하려고 했던 두 사람의 의도는 완전히 좌절된 것이다.

도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곳에서 그들이 가진 돈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볼테르의 계몽주의☆가 단순히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출현한 것은 아니다. 리스본의 대지진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다. 국가도, 신도, 그리고 가족도 대지진의 위기 속에서 나를 구원할 수가 없다. 오직 나만이, 구체적으로 말해 나의 이성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만이 남은 경험, 혹은 대지진 속에서 홀로 생존해야 하는 고독한 주체를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라면 아마 단독자(den Enkelte)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단독자란 모든 확실성을 빼앗긴 채 홀로 지상에 던져진 인간의 모습을 가리키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키르케고르의 단독자 개념이 ‘대지진’이라는 그의 내적 체험과 분리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때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것은 나에게 졸지에 모든 것을 새롭고 확실한 법칙에 따라 해석할 것을 강요한 무서운 대변혁이었다. 그때 나는 내 부친의 많은 나이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저주라는 것을, 즉 가족들의 뛰어난 정신적 능력은 오직 가족들끼리 서로 다투고 갈라지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깨달았다.
―‘일기(Papirer)’

물론 실제로 대지진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확실성이 붕괴되는 경험을 키르케고르는 1837년, 그의 나이 24세 때 했던 것이다. 청년이 된 그의 뇌리에는 마치 지진이 발생하여 지하에 숨겨져 있던 암반이 튀어나온 것처럼 유년 시절의 기억이 뚜렷이 떠오르게 된다. 아버지가 힘이 들었을 때 하느님을 부정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의 몸에서 잉태되었다는 사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키르케고르가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외로움을 감내하는 단독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었다.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삶의 모든 확실한 토대가 붕괴되는 경험과 유사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내적 경험을 ‘대지진’이라고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확실성이 붕괴되자마자 그는 “모든 것을 새롭고 확실한 법칙에 따라 해석할 것을 강요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불안과 불확실의 상황에 놓일 때 인간은 지금까지 통용되던 진리를 모조리 회의하게 된다. 어쩌면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서는 이런 회의는 불가피한 법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안정감을 주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인간은 하루하루 삶을 살아내기도 버거울 것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른다. 볼테르처럼 실제로 지진이 발생해서 모든 확실성이 붕괴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아니면 키르케고르처럼 지진과 무관하게 모든 확실성이 붕괴되는 내적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인간은 자신만의 힘으로 새롭게 확실성을 쌓아 나가게 될 것이다.

문득 ‘캉디드’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만 합니다.’ 지금 일본 사람들은 모든 확실성을 빼앗긴 채 단독자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볼테르나 키르케고르처럼 그들은 하나하나 확실한 삶의 토대를 마련해갈 것이며 과거보다 더 위대해질 것이다. 나의 이야기가 불행한 우리 이웃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계몽주의(啓蒙主義·enlightenment)☆
17, 18세기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낙관했던 지적 경향이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인간이 타인의 지도 없이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는 것을 계몽이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결국 계몽주의의 핵심은 외적인 계몽이 아니라 자율적인 계몽을 긍정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계몽주의는 절대적인 국가 권위나 초월적인 종교에 대해 일정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인간의 자유, 그리고 평등을 강조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무반성적인 습관이나 종교적 교리에 반대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서양의 민주주의 전통은 바로 이 계몽주의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성장한 것이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1813∼1855)☆☆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개신교 교육을 받았던 종교철학자. 사랑하는 여인 올센과의 파혼 경험, 그리고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청년 시절의 기억은 그의 사상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 신에 이를 수 있다는 헤겔의 보편적 이성주의에 반대하면서, 그는 신앙이란 ‘목숨을 건 비약’이라고 규정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신을 포함한 타자에 이르는 일체의 합리적 매개가 없기 때문이다. 주요 저서로 ‘두려움과 떨림(Frygt og Bæven)’, ‘반복(Gjentagelse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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