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16>왜 홍대엔 젊은이들, 종로엔 노인들이 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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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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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이 그렇듯이 먼 훗날엔 홍대앞이 ‘노인의 거리’ 될수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서울 종로통, 특히 종로2가와 3가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묘한 경계선이 생긴 지 오래다. 북으로는 인사동과 낙원상가에서 남으로는 명동성당에 이르는 길이 경계선이다. 탑골공원 방향 종로3가에는 수많은 노인이 북적거리지만 경계선을 넘어 종로2가 쪽에는 노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젊은이들도 종로3가 쪽에서는 무엇인가 불편함을, 그리고 반대로 노인들도 종로2가 쪽에서는 무엇인가 이질감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노인들이 서서히 종로2가 쪽으로도 모습을 많이 보이는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종로2가와 3가 사이에 유지되었던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경계선이 점점 광화문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형국이다. 아마 종묘, 광장시장, 그리고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노인문화권이 노인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확장 중인 모양이다.

종로3가를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노인문화권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곳에 모인 노인들은 도시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낸 도시화 첫 세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리고 장년 시절 종로통에서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술로 풀었으며, 1960년대와 70년대 해적 LP판을 구하기 위해 낙원상가나 세운상가를 떠돌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 바다에서 하천을 거쳐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작은 내에까지 이르러 알을 낳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도시에서 자란 첫 세대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자신의 젊은 시절 낭만을 향수처럼 찾아 종로통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노인은 5000원 내외의 용돈을 갖고 이곳에 모여든다. 그들은 생면부지의 친구와 함께 종잣돈을 만들어 술을 마시며 왕년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일쑤다. 또 이곳에서는 노인들을 상대로 한 노점상, 그리고 심지어 매춘마저도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젊은이들이 감히 근접하기 힘든 나름대로의 노인문화가 제대로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서울도 더는 동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이질적인 공간으로 분화하고 있다. 서울에는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서로 분리돼 각각 점유하고 있는 공간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주로 홍대나 강남에 모여들고, 노인들은 종로통에 모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젊은이들과 노인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일까?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꺼리고, 노인들도 젊은이들 속으로 당당하게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기원전 106∼기원전 43)가 보았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이다. 키케로 시절 노인들은 젊은이들과 일종의 건강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년은 성가신 것이 아니라 즐겁다네. 마치 현명한 노인들이 훌륭한 자질을 타고나 젊은이들을 보고 좋아하고 젊은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음으로써 노년이 더 수월해지듯이, 젊은이들도 덕을 닦도록 이끌어주는 노인들을 좋아한다네. 자네들이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 못지않게 나도 자네들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나는 생각하네.

―‘노년에 관하여(De Senectute)’
로마시대가 아니라도 도시화가 되기 이전 과거 우리의 시골 공동체를 떠올려 보라. 한창 벼가 자랄 무렵 가뭄이 유례없이 극성이다. 그러면 마을의 젊은 남성들과 장년의 남성들은 모여서 대책을 의논하게 될 것이다. 뾰족한 결론이 나지 않을 때 그들은 함께 마을의 가장 연장자를 찾아갈 것이다. 그로부터 마을에 닥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혜안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면 최고령 연장자로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퀭한 눈으로 기억을 더듬어 마을 사람들이 탄복할 만한 해법을 알려주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내가 젊었을 때 이와 비슷한 재난이 있었지. 그때 어른들은 말이야….” 노인의 말이 시작되면 마을의 모든 사람이 그의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이렇게 과거에 노인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제공했으며 강건한 신체를 가진 젊은이들은 그들의 지혜를 존경했고 사랑했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노인과 젊은이가 공존했던 사회가 와해되고, 노인과 젊은이가 소통하지 못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일까?

산업자본이 추동했던 모더니즘(modernism)의 논리에서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산업자본은 소비자의 필요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생존할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산업자본이 작동하기 이전 시대에는 사람들은 사용가치가 없어질 때만 낫을 새로 구입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량의 낫을 소지하고 있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산업자본은 소비자가 구매한 상품이 사용가치를 다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대량 생산된 상품을 신속하게 판매하지 않는다면 산업자본은 붕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자본은 필요 이상의 상품을 사도록 소비자를 유혹할 수밖에 없으며 유혹 전략의 핵심은 바로 신상품을 통한 유행의 전파였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사용가치가 아직도 있는 제품을 버리고 새로운 유행의 신상품을 앞다퉈 구입했던 것이다. 그래서 옷장이나 신발장에는 유행이 지난 옷들과 신발이 수두룩하게 쌓이게 된 것이다. 산업자본의 생존 전략에서 ‘모더니티(modernity)’의 논리를 간파했던 철학자가 바로 리오타르☆(Jean-Fran¤ois Lyotard·1924∼1998)였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란 말을 인구에 회자시킨 것으로 유명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모더니티는 다른 실재들을 발명하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
모던(modern)이란 말은 ‘새로움’을 의미하는 중세 라틴어 모데르나(moderna)에서 유래한 말이다. 결국 모더니티는 새로움, 그리고 모더니즘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새로움이 중시되자마자 낡음도 동시에 부각된다는 점 아닐까? 산업자본의 생리, 그리고 모더니즘의 취향은 ‘낡은 것은 무가치해서 버려야 할 것이며 새로운 것은 중요한 것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무의식적 경향을 우리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지금도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유행에 발맞춰 가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라는 사실을 자랑한다. 신상품을 지향하는 경향성은 새로움과 낡음을 구별한다는 것, 나아가 낡음보다는 새로움이 소중하다는 가치평가마저도 낳게 된다. 이로부터 노인을 폄하하고 젊은이를 높이는 풍조로 이어지는 것은 한 걸음이면 족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노인들은 스마트폰이나 새로운 상품들에 대한 적응도가 현저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반면 젊은이들은 어떤가? 노인이 아니더라도 장년층 성인들도 신상품의 작동법을 알려면 젊은이들에게 물어봐야만 하는 게 우리의 현재 모습 아닌가? 이제 신상품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는 도시생활에서 지혜는 노인들이 아닌 젊은이들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종로통에 모여든 노인들은 도시에서 생활한 첫 세대, 그러니까 모더니즘 첫 세대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한때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사람들, 통기타와 카페 문화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던 사람들이다. 당시 그들은 자신의 윗세대 사람들을 새로운 풍조를 모르는 낡은 세대라고 조롱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도 나이가 들어 자신들이 했던 조롱을 지금 젊은이들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다. 업보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자주 찾아드는 종로통을 떠나 홍대나 강남으로 자신들의 근거지를 옮겼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젊은이들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종로통에 노인들이 모여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노인이 되었을 때 홍대나 강남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에 연어처럼 발걸음을 옮기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바로 이 점이다. 젊은이들이 종로통에 모여든 노인들에게 배울 것이 있고, 노인들은 홍대나 강남에 모여든 젊은이들에게 가르칠 게 있다. 새로움만을 편집증적으로 추구하는 삶이 가진 허망함을 가르치고 배워야만 한다. 산업자본은 카멜레온처럼 부단히 자기 변형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은 사계절의 변화처럼 젊은 시절에서 시작돼 노년 시절을 거쳐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의외로 우리 시대 노인들과 젊은이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울 것이 많다는 것, 이것은 불행일까, 아니면 다행일까.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리오타르(Jean-Fran¤ois Lyotard·1924∼1998)☆
모더니티의 본질이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집착에 있다는 것을 밝혀낸 현대 프랑스 철학자. ‘숭고’에 대한 칸트의 통찰에 근거해 그는 현대사회의 심미적 특성을 해명했다. 웅장하고 거대한 자연물에 직면할 때 느껴지는 ‘숭고’는 동일한 대상에 다시 직면하는 경우 그 강도가 약해지는 법이다. 그는 숭고의 논리가 바로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너니티를 관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포스트모던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 ‘분쟁(Le Diff´erend)’ 등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새로운 상품도 다른 새로운 상품이 나오는 순간 낡아질 수밖에 없다. 계속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새로움의 강박증은 불가피한 법이다. 그래서 모던은 자신을 극복해야만 모던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리오타르가 “어떤 작품도 우선 포스트모던(postmodern)해야만 모던(modern)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모던은 포스트모던해야만, 다시 말해 모던을 ‘넘어서야만(post)’ 역설적이게도 계속 모던한 것으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모던의 핵심은 계속 새로움을 넘어서려는 강박증적 운동을 상징하는 ‘포스트’라는 단어에 온전히 함축돼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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