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13>정(情)으로 살아가는 육중한 슬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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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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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장롱처럼 보이는 건, 날 떠나지 않을거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놓여있다 장롱이 그렇듯이/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있고/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도종환의 시 ‘가구’의 일부분이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대목에 이르러 우리 마음은 무겁고 어두워지기만 한다. 한때 ‘접시꽃 당신’이란 시로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며 우리의 메마른 정서를 촉촉하게 만들었던 시인이 어쩐 일로 이렇게 무거운 시를 썼는지 모를 일이다. 불행히도 시인의 가정생활은 녹록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진짜 불행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종환 시인의 시를, 자신의 상황을 노래하는 것으로 공감하고 슬퍼한다는 데 있는 것 아닐까.

타인을 만났을 때 우리는 두 가지 감정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하나가 기쁨과 쾌활함의 감정이라면 다른 하나는 슬픔과 우울함의 감정일 것이다. 기쁨이나 슬픔 중 어느 감정도 들지 않은 채 타인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물리적으로 만난 것 같지만, 사실 만나지 않는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다. 길거리를 거닐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렇지만 이 경우 우리는 어떤 감정적 동요도 느끼지 않는다. 나중에 집에 들어와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이 스쳐간 사람들 중 떠오르는 얼굴이 거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쾌활함이든 우울함이든 감정적 동요를 낳지 않는 만남은 만남이란 외양을 가지고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남이라고 볼 수 없다. 어쨌든 인간의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쁨과 쾌활함을 가져다주는 만남을 지속하고, 반대로 슬픔과 우울함을 가져다주는 만남을 피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서양 철학자 중 난해하다고 정평이 있는 스피노자(1632∼1677)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이란 감정을 기초로 인간의 내면과 삶을 숙고했던 철학자였다. 그런 그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사랑의 관계를 우회할 리 만무하다.

사랑(Amor)은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한다.

―‘에티카(Ethica)’

스피노자 덕분에 사랑에 빠질 때 우리가 어떤 감정에 빠지며 나아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는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강한 기쁨이 샘솟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우리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누군가와 만났을 때 강한 기쁨이 발생한다면 그와 헤어져 있을 때 강한 슬픔은 불가피한 법이다. 당연히 우리는 내게 기쁨의 감정을 선사했던 그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의 기쁨을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반응일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말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한다’고 말이다.

황지우 시인이라면 ‘利他心(이타심)은 利己心(이기심)일’ 뿐이라고 노래했을 상황이다. 그렇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애인에게 헌신적으로 잘해주려고 한다. 애인에게 기쁨을 안겨주어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책략인 셈이다. 애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추구하고 슬픔을 회피하려는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쁨을 유지하려는 이기적인 감정이다. 당연히 애인이 불가피한 일로 내 곁을 떠나게 될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혹시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애인이 나와 있을 때보다 더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불행히도 이 가능성이 현실화된다면 애인은 더 큰 기쁨을 찾아 나를 떠나게 될 것이다. 사랑이 항상 불안감, 질투심, 그리고 기다림의 감정을 수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의 감정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묘사했던 롤랑 바르트☆가 이 대목을 놓칠 리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X가 나를 두고 혼자 바캉스를 떠나더니 아무 소식이 없다.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것일까? 우체국이 파업 중일까? 아니면 무관심? 거리감을 두려는 전략? 순간적인 충동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 또는 단순히 아무 일도 아닌 걸까? 나는 점점 더 괴로워하며 기다림이란 시나리오의 모든 막을 거친다.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애인이 자신을 두고 홀로 떠났을 때 번민에 사로잡힌 화자의 심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분명하다. 혼자 바캉스를 떠나려고 했을 때, 화자는 애인을 말릴 수가 없다. 그것은 애인이 기뻐하는 일을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화자는 애인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기쁨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다. 그것이 설령 홀로 바캉스를 떠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자신을 두고 바캉스를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나와 있는 것보다는 바캉스가 더 큰 기쁨을 준다는 것 아닌가? 혹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바캉스 기간에 함께 있을 동성의 혹은 이성의 동료들이 더 큰 행복감을 선사한다는 의미 아닌가? 쿨한 척 애인의 바캉스를 허용했지만, 화자의 속내는 결코 쿨할 수가 없다. 괜히 보냈다는 후회, 그리고 연락이 없는 애인의 무관심에 마음은 타들어가기만 한다. 만약 어느 순간 애인이 돌아온다면, 화자는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더군다나 바캉스 동안 애인이 고생을 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것이다. 애인도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했다는 사실을 배우고 왔으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감정이다. 만났을 때 우리에게 기쁨을, 반대로 헤어져 있을 때 슬픔을 가져다주는 인간관계가 바로 사랑이니까. 그렇지만 어느 사이엔가 사랑의 관계는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사랑의 부패, 혹은 변질이라고나 할까. 이제 만났을 때 우리는 별다른 기쁨을 얻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아직도 헤어져 있을 때는 상대방의 부재가 힘들기만 하다. 이것이 바로 정(情)☆☆이다. 한때 정열적으로 사랑했던 두 사람이 정이란 감정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도종환 시인은 ‘가구’와 같은 관계로 살고 있다고 슬퍼했던 것이다.

사랑과 정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변을 살펴보면, 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와서 냉장고나 책상을 보고 기쁨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 날 집에 들어왔을 때 냉장고나 책상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슬픔이나 우울함을 느낄 수 있다.

집에 들어오면 아내가 혹은 남편이 텔레비전, 책상, 소파 사이에 마치 하나의 가구처럼 익숙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신혼 초에는 남편도 혹은 아내도 상대방이 가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나 그녀는 상대방 앞에서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향할 것이다. 가구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에게는 아직 희망은 있다. 상대방이 늦게 돌아오거나 소식이 묘연하면,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직 두 사람에게는 헤어져 있을 때 발생하는 슬픔이란 감정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전혀 답이 있을 수가 없다. 남편이 출장을 떠났을 때 즐겁다거나 혹은 아내가 친정에 갔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같이 있을 때는 슬프고 우울하지만 헤어져 있을 때는 기쁘고 쾌활해진다는 것, 즉 두 사람이 미움의 관계에 돌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정으로 살아가는 삶은 미움의 관계보다는 소망스러운 것이다. 비록 도종환 시인이 사랑의 열정을 떠올리며 가구처럼 살아가는 삶에 대해 탄식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가구처럼 변질된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복원할 방법은 없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애시절이나 신혼시절에 우리가 상대방과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이유는 상대방이 항상 나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에게 그렇게 헌신적으로 열정적으로 기쁨을 주려고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기쁨을 줄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나를 떠날 수 없다는 자만심에 빠지는 순간, 사랑의 열정은 이제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셈이다. 이제 상대방이 자신의 곁을 항상 떠날 수 있다는 각오로 초인종을 눌러보라.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친숙한 가구가 아닌 매력적인 애인을 다시 발견할 것이다.

강신주 철학 박사

롤랑 바르트☆
(Roland G먆rard Barthes·1915∼1980)
독일의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1892∼1940)과 비교될 정도로 탁월했
던 현대 프랑스 인문학자. 그는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기호학, 실존주의,
마르크시즘, 인류학 등등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현대 지성계를
풍미했던 탁월한 인물이었다. 수많은 저작을 남겼지만 ‘사랑의 단상’은 매우
중요한 책이다. 사랑을 통해서 그는 현대 서양철학이 고민했던 속앓이, 즉
타자와의 차이에 대한 감수성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정(情)☆☆
친숙한 관계 혹은 습관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사랑은 누군가와 만
났을 때 기쁘고 그와 헤어져 있을 때 슬퍼지는 관계다. 반면 정은 만났을 때
무관심하지만 헤어져 있을 때 슬픔이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정의된다. 헤어
져 있을 때 슬프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는 순간 일순간이나마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에는 사랑의 열정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습관적 관계를 오래 방치하면 헤어져 있을 때도 별다른 슬픔을 느
끼지 않는 관계, 즉 무관심의 관계가 찾아올 수 있다. 조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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