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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삶/전영우]북촌 소나무길 걸으며

입력 2006-01-02 03:00업데이트 2009-10-0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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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똬리를 틀고 있는 찬 고기압 덕분에 하늘은 더없이 높다. 바람이 찰지라도 아침 햇살은 전에 없이 투명하다. 시도 때도 없이 머리 위까지 낮게 내려앉던 회색 하늘의 스모그는 어느새 사라졌다. 아무리 동장군이 맹위를 떨칠지라도 짙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를 더는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추운 겨울이 만든 뜻밖의 선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세한(歲寒)의 의미를 음미하고자 겨울을 이겨 내고 있는 소나무를 만나러 나선다.

삼청터널을 지나 꼬불꼬불 굽은 도로를 천천히 내려오면서 왼편 산록에 눈길을 준다. 초목이 무성하던 때 넓은잎나무들에 꼭꼭 가려 있던 붉은색을 띤 곧은 줄기들이 군데군데 나타난다. 동편 북악 산록을 덮고 있는 토종 소나무들이다. 엄동설한에나, 그것도 눈 밝은 이에게만 그 진면목을 내비치는 소나무들이 새롭다. 보안을 이유로 수십 년 동안 출입을 막았던 덕분이다.

서울 인근에서는 쉬 볼 수 없는 북악 기슭의 멋진 솔숲을 눈으로나마 즐기고자 감사원 앞에서 잠시 멈춘다. 동편 북악 산록의 소나무가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상록의 푸른빛이 되살아남을 안다”고 했던가. 한겨울에도 푸른빛이 청청하다. 삼청공원으로 내려설수록 시야가 가려져서 소나무로 뒤덮인 북악 산록은 눈앞에서 점차 사라진다. 그래서 그 강건한 모습을 가슴에 담고자 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지금은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시민들에게 개방될 북악 산록의 동편 솔숲을 떠올리면서 삼청공원에 들어선다. 100년 묵은 장대한 소나무들이 십년지기처럼 나를 반긴다. 마침 지나는 찬 서북풍이 ‘쏴’하는 솔바람 소리를 선사한다. 잊지 않고 찾아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일까.

걸음을 다시 감사원 쪽으로 돌려 가회동으로 옮긴다. 가로변에 곧게 서 있는 소나무의 선홍빛 줄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꽤 굵어진 둥치가 든든하고 잔가지를 달고 있는 나뭇갓도 무성해졌다. 어느새 자리를 잡았구나. 정겹고 고마운 마음이 솟구친다.

가회동 길을 넓혀 소나무를 심던 6, 7년 전을 떠올려 본다. 쉬 상상도 못했던 소나무 가로수 길이 서울 한복판에 생긴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하지만 1930년대만 해도 서울 곳곳의 가로수가 낙락장송들 아니었던가.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자리 잡은 북촌을 가로지르는 길에 70년 만에 되살아난 소나무 가로수 길은 나를 행복한 정취에 젖게 했다. 그래서 시내를 나갈 때면 번잡한 대로보다는 삼청터널과 가회동 길을 지났고, 짬을 내어 소나무 길을 거닐었다.

자연의 숨결이 그립지만 먹고사는 일로 시간마저 빠듯할 때, 세상이 뒤숭숭 시끄럽기만 할 때,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 인간의 어리석음이 눈앞을 가릴 때 나는 감사원에서 헌법재판소까지 소나무와 벗하며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혹한의 추위를 이겨 내는 소나무의 오연한 자태와 불굴의 기개에서 나의 부족함을 채워 줄 유유자적의 정신을 배운다. 어느새 헛된 망상은 사라지고 강퍅해진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대신 소나무가 내품는 꿋꿋한 기상과 생생한 기운이 가슴 가득 채워진다. 엄동설한을 피하지 않고, 내가 겨울을 나고 있는 소나무를 만나러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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